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첫 문단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7세기 영국의 유명 성직자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 (John Donne)의 기도문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존 던은 기도문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弔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니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묻지 말라고 한다. 우리 각자는 분리된 섬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대륙이고 그래서 이 세상 그 누구의 죽음도 당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존 던, 그리고 헤밍웨이의 생각이다. 불가(佛家)의 연기론(緣起論)을 닮은 그들의 인생관이 요즈음 내 마음에 크게 공명(共鳴)한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과 정파를 뛰어 넘는, 조용하지만 뜨거운 추모 분위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지만, 건너 듣기만 했지만 그 속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헤밍웨이가 그렇다. 마초, 턱수염, 쿠바, 수첩, 카페, 명언 등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헤밍웨이는 내면적으로 매우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뿐만 아니라 대개 한번쯤은 들어봤을 고전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도 그의 작품이다. 종군 기자로 출발해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 되지만 그의 생애는 굴곡이 많았다. 태생적 아나키스트 기질 때문인지 세계를 떠돌며 겪은 일 때문인지, 그는 한때 공산주의자라는 의심도 받았고, 피해의식과 우울증도 겪었던 모양이다. 『노인과 바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결국 스스로 62년의 생을 마감한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승리하고 또 좌절하는 소설 속 주인공 모습 그대로 살고, 죽었다. 헤밍웨이를 생각할 때 나는 낭만적 프라테르니테를 떠올린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정신으로 언급되는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단어가 프라테르니테다. 형제애나 동지적 유대(紐帶) 의식을 의미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라테르니테는 서구 공화주의의 핵심적 가치가 되는데 그것의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이 1930년대 스페인 내전(內戰)에서 나타난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전혀 혈연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지구 저편의 민주공화파를 돕기 위해 국제여단이라 불리는 의용군에 자원하고 파시스트 군대와 싸우게 된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바로 이런 낭만적 프라테르니테에 관한 자전적(自傳的) 작품이다.
게리 쿠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미국의 지식인이다.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군대에 대항하는 현지 시골 사람들과 함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철교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철교를 폭파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부상을 당해 걸을 수 없게 된다. 추격하는 적군들을 저지하며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같이 남아 운명을 함께하려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다. 자신은 여기에 남지만 그녀는 마드리드로 가야한다고 설득하며 조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중 한명이라도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가 산 것이니 당신은 우리를 위해 떠나야한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일을 하지만 당신이 있는 그곳에 분명 함께하리라. 헤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별이라 생각지 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프랑코 파시스트 군대와 싸울 전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전 세계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사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팔과 다리, 목숨을 내 놓겠다고 나선 그들 중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섞여 있었다. 학살과 보복과 배신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내전(Civil war)이라는 가혹한 현실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세상이 결코 선과 악으로 명백히 구분되지 않음을 이들에게 가르친다.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때, 그곳에는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관념과 문자가 아니라 생생하게 삶속에서 실존하고 있었다.
리베르테(자유) 에갈리테(평등) 프라테르니테는 항상 순서대로 함께 언급되지만 동지애를 의미하는 프라테르니테는 앞의 둘과 구분되는 차별적 특성이 있다. 먼저 앞의 둘이 일종의 권리적 가치라면 프라테르니테는 도덕적 의무에 속한다. 또 리베르테와 에갈리테가 근대적 특성인 개인성(individuality)이나 주체성, 독립성과 연관되어있는 반면 프라테르니테는 부분성과 의존성, 공동체적 가치와 연관되어있다. 프라테르니테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리베르테와 에갈리테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적 개인들 간에 가능한 궁극적이고 이상적 결과 혹은 지향점이 된다. 스페인 내전은 이런 가치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과 실현을 위한 서로 다른 노력,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고 왜곡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난마처럼 얽혀버린 역사적 현장이었다.
프라테르니테 그리고 노회찬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학적 텍스트가 없을 뿐이지 이념 갈등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20세기는 결코 스페인 못지않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그래서 프라테르니테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보수 진보 진영 구분을 넘어서는 가치가 프라테르니테다. 그것은 소통과 연결의 가치고 공동체의 기반이자 궁극적 지향이다. 좌나 우 모두 그것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노회찬 의원은 바로 그 프라테르니테를 삶속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실천해온 사람이다. 그의 주장과 정책,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우하고 소외된 우리 이웃에 대한 그의 헌신과 형제적 유대에 우리 모두는 많을 빚을 지고 있다. 노 의원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으면서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추모하는 많은 이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 빚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이념과 정파가 달라도 그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애도하는 모습에서는 우리사회의 성숙도를 새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사람들은 정치를 허업(虛業)이라고 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노 정객도 그리 말했다. 대통령직(職)만 제외하고 모든 영화(榮華)를 다 누린 분인데도 그렇다. 어찌 정치만 그러하겠는가? 학문도, 사업도 다 마찬가지다. 입신양명이나 개인적 성취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 말이 타당하다. 삶 자체도 그런 차원에서는 허업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온전한 전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한 부분이라는 존 던의 기도문은 큰 위로가 된다. 내 생명의 유한성을 너무 한탄할거 없다. 나와 전혀 다른 이들에 대한 형제적 유대, 프라테르니테를 삶의 근간으로 삼을 때 정치도 학문도, 그리고 우리 인생도 허업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우리는 계속 가는 것이다.
안민호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 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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