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지구의 끝에서 만난 친절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8.07.28 06:34
오로라를 찾아가는 여행 내내 눈과 싸워야 했다. 사진은 30일 동안 함께 했던 캠핑카./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다시 여름 자작나무 숲에 다녀왔다. 꼭 한 번 가고 싶다고 벼르던 친구와 함께였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뜨거웠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단점이 있다면 한여름에 그늘이 인색하다는 것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선경에 든 듯 시원한 숲이 펼쳐지지만 오르내릴 땐 그늘이 별로 없는 임도(林道)를 이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구간에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그래서 여름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침 이른 시간에 다녀오라고 권하고는 한다.

뙤약볕 아래 왕복 3.8㎞를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많은 탐방객이 더위에 지친 얼굴로 올라가다가 일찌감치 다녀오는 나를 만나면 반색하는 얼굴로 길을 묻고는 했다.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다 온 건가요?" 이런 질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정말 이렇게 애써서 올라갈 만큼 좋은 곳이에요?"처럼 대답하기 조금 난감한 질문도 있었다. 얼마나 덥고 힘들면 저럴까. 그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줬다. 내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가장 더울 때는 가장 추웠던 여행을 생각하고 가장 추울 때는 가장 더웠던 여행을 생각하라고 했던가. 여행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세세하게 길을 알려주는 나라고 덥지 않을 턱은 없다. 열기 속을 걷다 보니 문득 오로라 탐험을 갔던 몇 년 전 겨울이 생각났다. 캠핑카로 한겨울에 북유럽을 누볐으니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노르웨이의 최북단이자 북극의 관문이라는 트롬쇠에서는 추위와 초조감으로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육체적‧심정적으로 밑바닥에 있을 때 가장 친절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어디서든 길을 가르쳐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만난 뒤부터였다.

그날도 '북극의 관문' 트롬쇠의 하늘은 빗장을 단단히 지르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내 초조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오로라를 마냥 기다릴 만한 시간과 경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대를 버릴 수 없어 트롬쇠 박물관에서 낮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북극의 자연과 생활사가 전시된 곳이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사미족(Sámi People)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와 보니 역시 눈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폭설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눈이 쏟아진다는 것은 그날도 오로라를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시내의 카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차를 시켰지만 눈은 찻잔이 아니라 창밖으로 가 있었다. 참으로 인색한 하늘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오로라를 볼 방법이 없겠는지, 어디로 가면 가능성이 높을지 물어보았다. 그들이라고 천기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나보다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노르웨이 나르비크라는 도시의 인근에서 우연히 만났던 오로라./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그때 금발머리의 젊은 여성 하나가 들어와 옆자리에 앉더니 자꾸 이쪽 자리를 흘끔거렸다. 분명하고 의도적인 '관심'이었다. 동양인이 신기해서 그러나? 그 정도로 동양인이 귀하지 않은 곳인데? 트롬쇠에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꽤 많이 찾는 곳이다. 한참 탐색을 하던 그녀가 뭔가 결심했다는 듯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탁자 위에 대형 카메라가 있으니 오로라를 찾아온 사람들이라고 짐작한 것 같았다.

"오로라 봤어요?"

"아뇨. 아직 못 봤는데, 걱정이에요. 눈이 저렇게 와서…. 방법이 없을까요?"

인사 끝에 상황을 하소연했더니, 그녀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내가 오로라를 꼭 보여주마'하는 결의까지 엿보였다. 전화가 닿는 곳마다 뭔가 부탁하는 눈치더니, 휴대전화를 열어 이것저것을 검색하고 빽빽하게 메모까지 해가며 정보를 찾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친절한 아가씨도 살고 있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 뒤 정리한 메모를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트롬쇠의 누구를 만나면 오로라를 쉽게 찾을 수 있는지, 사무실은 어딘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되는지…. 약도까지 세세히 그려가며 가르쳐줬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서로의 내력을 자연스럽게 교환했다. 앨리스라는 이름의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트롬쇠에서 일한 지 5년 정도 됐다는 것이었다. 밝고 아름답고 친절한 아가씨였다. 낯선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나서준다는 것, 말은 쉬울지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친절했지만, 하늘은 친절하지 않았다. 눈은 계속 퍼부었고 그날 역시 오로라와 만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친절이 퇴색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한 여성의 진지하던 눈빛과 따뜻하던 목소리는 여전히 내가 걷는 길의 등대로 자리 잡고 있다. 누가 내게 길을 물을 때 과도할 정도로 친절한 까닭이다. 특히 무척 춥거나 더울 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등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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