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의 관부재판에 관한 이야기

김서연 ize 기자 | 2018.07.13 09:06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그대로 담아내려 한 영화 ‘허스토리’. 이 영화의 카피 문구처럼 남성에 의한 역사가 아닌 여성들의 역사적 기록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관부재판
‘시모노세키 재판’이라고도 불리는 관부재판의 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배상 판결을 받아낸 재판으로,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소송을 벌이고 있었지만 관부재판만이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거뒀고,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은 재판이었다.

김문숙 단장(당시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원고단을 꾸리게 된 계기
1980년대 후반 여행사를 운영하다가 기생관광을 오던 일본인들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된 김 단장은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와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처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만 찾던 그는 군수 공장에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존재도 알게 되면서 전국에서 250여 명의 피해자들을 찾았고, 그 중 10명과 함께 원고단을 꾸려 관부재판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고단
1991년 10월부터 12월까지 부산 신고 전화로 신고한 8명 중 4명이 관부재판에 참여했고, 1993년 12월에 5명, 1994년 3월에 1명이 추가되면서 총 10명의 원고단이 꾸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이순덕, 하순녀, 박두리 할머니),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유찬이, 박소득, 박순복, 이영선, 강용주, 정수련, 양금덕 할머니)으로 이루어진 원고단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2017년 4월 4일 세상을 떠났고, 해당 부고 기사에서 이 할머니를 “관부재판 마지막 원고”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명의 원고 중 2명(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영선, 양금덕 할머니)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해당 오보를 영화 엔딩자막에 인용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개봉 이후 사실을 확인한 연출진은 양금덕 할머니를 찾아가 오해를 풀고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참고로 양금덕 할머니는 관부재판 패소 이후 1999년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8년 패소, 2012년 다시 한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1,2심에서 승소하였고 현재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재판 과정과 결과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 최초증언 기자회견에서 시작된 관부재판은 1991년 10월 19일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가 ‘정신대 신고전화’(당시 명칭)를 개설하면서 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992년 11월 14일 변호사에게 소송 위임장이 전달되고, 1992년 12월 25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고소장이 제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재판은 1998년 4월 27일까지 6년 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총 10명의 원고단으로 진행되었다. 원고단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은 후원모임(‘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을 결성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재판을 하기 위해 일본에 올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3명의 일본 변호사들이 무료 변호인단까지 꾸리며 일본에서의 재판을 도왔다. 제소는 1992년 12월 28일, 1993년 12월 1일, 1994년 3월 14일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1993년 9월 6일부터 1997년 9월 29일까지 총 20회의 구두변론이 진행됐다. 그리고 드디어 1998년 4월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일본정부가 원고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에 각각 30만 엔, 모두 90만 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죄 청구 요청은 인정하지 않았고, 근로정신대 피해자 원고인 7명의 청구 소송은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그 뒤 경질됐고, 일본정부의 항소와 상고 끝에 2003년 최고재판소는 기각 결정을 내리며 판결을 뒤집었다.

시모노세키
제소지로 시모노세키를 선택한 이유는 원고단 할머니들의 출정이 시간적, 경제적으로 용이하다는 점과 일본에서 양심적인 재판관이 수도보다는 지방에 비교적 많다는 점, 무엇보다 법률적으로 시모노세키가 강제 연행에 의해 피해 할머니들이 상륙한 지역으로서 불법 행위지였기 때문이다. 당초 일본은 도쿄 지방재판소로 이송할 것을 제기했지만, 변호단은 출정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상세히 증명하여 시모노세키여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였고,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들이 모인 ‘시모노세키를 지원하는 모임’에서 단기간에 10,000명의 서명을 모아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시모노세키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영화와 실화
13명의 변호인단 중 이상일 변호사(김준한)는 실제로 관부 재판에 참여했던 재일 교포 이박성 변호사를 모델로 했다. 이 변호사는 현재 일본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실제로 태평양 전쟁 유족회의 사죄 소송에서 무료로 변론하기도 했다. 재판 당시 김문숙 단장은 할머니들을 위해 결혼 예단 이불을 들고 출국한 적이 있으며, 할머니들은 재판장과 숙소를 오가는 차 안에서 일본 군가를 부르곤 했다. 원고단은 증인을 찾기 위해 일본 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실제 재판에 참여한 박소득 할머니의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수가야미 도미가 재판 소식을 듣고 후원회에 연락하여 법정에서 증언했다. 수가야미 도미는 당시 진행됐던 전후 보상 재판 사상 실제 사건과 관계된 첫 일본인 증인이었다. 재판 당시 결성된 후쿠야마 연락회는 매 재판마다 일체의 체류 비용을 지원하고, 6년에 걸친 재판 과정을 담은 소식지를 발행 및 배포하며 재판의 정당성과 지지를 호소하는 등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1심 판결 당시 일본군 ‘위안부’ 원고로 참여했던 박두리 할머니는 재판장에게 “그 돈 안한다. 너희 해라”라고 말했다.

현재
김문숙 단장은 일본군 강제 ‘위안부’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비로 부산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하였고, 현재까지 관부재판(시모노세키 재판) 기록의 유네스코 등정을 위해 모금과 강연을 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지만 유네스코 내의 발언권 등의 문제로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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