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킬'…노인을 위한 도로는 없다

머니투데이 남궁민 기자 | 2018.07.05 05:01

먼 횡단보도·짧은 파란불·'뻥' 뚫린 도로…신체 약한 노인들 사고 내몰려

지난 4일 서울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앞 도로에서 한 남성이 무단횡단 하고 있다. /사진=남궁민 기자
#지난 4일 서울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앞. 병원에서 나온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좌우를 살핀다. 잠시 뜸 들이던 노인은 도로 건너편 시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듯 무단횡단을 지켜보던 상인 김모씨(40)는 "하루에도 수없이 보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지난해 가장 많은 노인 보행자 사고(행정안전부 통계)가 난 곳이다.

길 위의 노인들이 위험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고로 사망한 보행자 1675명 가운데 노인은 906명으로 54%에 달했다. 하루에 2.5명의 노인이 차에 치여 죽는 셈이다. 낮은 준법의식이 원인으로 꼽히지만, 노인 보행자를 고려하지 않은 도로와 신호체계도 위험한 보행을 부추기고 있다.




◇너무 먼 횡단보도…美·日보다 간격 '2배'


청량리사거리~성바오로병원교차로 모습. 횡단보도가 병원 입구에서 100~120m가량 떨어져 있다. /사진=남궁민 기자
지난 4일 낮 11시 '전국 최다 노인 교통사고 지역'의 불명예를 안은 성바오로병원 주변 도로를 살펴봤다. 이 곳에선 지난해 15건의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병원과 청량리청과물시장 입구 사이 도로에서 특히 무단횡단이 빈번했다. 병원과 시장은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대표적인 장소다. 약 100m 거리에 횡단보도가 설치돼 있었지만 노인들은 "너무 멀다"고 입을 모았다. 주변을 지나던 박모씨(73·여)는 "허리, 다리가 아픈 노인들은 횡단보도까지 가기가 힘들다"며 "몸이 너무 힘들다보니 가로질러 가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도로교통공단 조사에 따르면 무단횡단 경험자의 절반 이상(51.6%)이 이유를 '횡단보도가 멀어서'라고 답했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횡단보도 설치 간격을 200m(집산·국지도로는 100m)로 규정하고 있다. 각각 90m, 100m로 규정한 미국과 일본은 횡단보도를 더 촘촘하게 설치해 무단횡단을 줄이고 있다. 현재 설치 간격을 100m로 줄이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 된 상태다.

◇너무 짧은 파란불…"건너다 보면 빨간불"

지난 4일 서울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사진=남궁민 기자
횡단보도 주변에서도 무단횡단이 발생했다. 한 노인은 파란불에 건너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불이 바뀌었다. 많은 차량들은 보행자를 기다렸지만, 일부 차량은 바뀐 신호를 보고 출발했다.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교차로에는 교통정리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노인들과 차량이 뒤엉키는 모습은 반복됐다.

이 교차로의 횡단거리는 건너편까지 약 35m, 대각선으로는 약 50m다. 문제는 짧은 신호시간이다. 성바오로병원 교차로의 보행신호 시간은 약 55초다. 일반적으로 1초에 1m 정도를 걷는 노인들이 건너기엔 빠듯하다. 1초당 0.8m의 보행속도를 가정하고 정해지는 어린이안전구역 만큼 신호를 늘려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원천봉쇄' 중앙분리대는?…"곧 설치한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우체국 앞 홍릉로.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남궁민 기자
지난달 무단횡단을 막기 위한 펜스가 인도 쪽에 설치됐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무단횡단 보행자들은 펜스가 없는 시장 입구를 향해 건너고 있었다. 상인들은 중앙분리대 설치를 대안으로 꼽는다. 노점상 이모씨(55)는 "펜스를 설치하고, 경찰이 막아도 무단횡단이 여전하다"면서 "다른 곳처럼 아예 중앙분리대를 설치해야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무단횡단이 빈발했던 청량리우체국 앞 도로의 경우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후 무단횡단이 급감했다. 올해 초 동대문구는 청량리사거리에서 경동시장에 이르는 구간을 '어르신 안심 안전구역'으로 지정하고 간이 중앙분리대 설치를 약속했다.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최근까지 분리대 설치를 위한 도로작업을 해왔다"며 "중앙분리대 예산이 책정됐고 곧 설치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남궁민 기자의 '추신'

안녕하세요 남궁민 기자입니다. 혹시 기사를 읽으시며 '노인들이 너무 막무가내인데'라고 생각하셨나요? 취재를 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왜 유독 사고가 잦은 곳이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노인들에게 '불친절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호가 끝나버려 도로에 갇힌 할머니, 다리를 절며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람까지. 노인과 아이, 장애인를 사고로 '내모는' 도로는 함께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기사의 씨앗이 될 제보를 기다립니다.

serendip153@mt.co.kr로 메일제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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