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의 편지]정자와 정원의 고향 담양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8.06.16 08:20
'담양' 하면 보통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누구는 울창한 대나무 숲부터 생각날 테고, 누구는 메타세쿼이어길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맨 먼저 정자와 정원이 떠오른다. 면앙정·송강정·식영정·소쇄원·명옥헌원림…. 유독 담양에 정자와 정원이 많은 것은 이곳에 은거한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양으로 가는 길은 옛 선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선비는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로 설명되고는 한다. 그들은 또 때가 아닌 줄 알면 물러나 자연 속에 묻혔다. 돌아온 이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었던 곳이 담양이다. 선비들은 시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지만 정자와 정원, 그들이 품었던 뜻은 여전히 남아 있다.

면앙정 전경./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먼저 죽녹원으로 간다. 선비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담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원이 죽녹원이다. 담양의 상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숲에 들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오솔길이 있다. 물론 어느 길을 택해도 상관없다. 전부 도는 데는 40분,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대숲 안에서는 손바닥만 한 햇빛도 귀하게 보인다. 빽빽한 댓잎 사이를 뚫고 내려온 햇살을 당겨 안으며 키 작은 나무들이 자란다. 천천히 한 바퀴 돈 뒤 생태전시관에서 대숲을 빠져나온다. 마음까지 푸르게 물든 것 같다. 찌뿌드드했던 몸도 한결 가뿐해졌다.

죽녹원을 떠나 면앙정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면앙정가가 떠오르는 곳이다. 누가 하늘에 비질을 했을까? 구름이 가지런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송순이 벼슬을 놓고 내려와 여생을 보낸 곳이다. 면앙정가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정자 주변에는 잎 넓은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정자의 뒤편에 서야 이곳 풍경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눈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들이 끝나는 곳에서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나간다. 마루에 앉아 시선을 멀리 둔다. 옛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그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송강정 전경./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고향, 송강정으로 오르는 계단은 설렘과 함께 한다. 야트막한 산에 안겨 용트림하듯 키를 재는 소나무들,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솔 향이 예사롭지 않다. 송강 정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오르내렸을까. 모르긴 몰라도 울화를 눅이는 게 먼저였을 것이다. 동인-서인의 싸움 끝에 물러나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들판은 넓고 시원하다. 잠시 땀을 들이며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중년의 사내를 생각한다. 권력을 잃은 뒤의 금단과 임금의 사랑을 잃은 뒤의 참담, 사람에 대한 실망은 또 오죽했으랴. 그런 고통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명옥헌 전경./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담양의 명소 중에도 명옥헌원림의 풍경은 발군이다. 연못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울울한 숲. 굵은 몸통의 소나무들이 읍(揖)으로 인사한다. 하지만 이 숲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배롱나무다. 늙은 나무들은 단장을 짚고, 금방이라도 누울 듯 시간을 견디고 있다. 배롱나무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7월이나 돼야 꽃잎을 열어 석 달 열흘 동안 세상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언덕 위의 명옥헌으로 오른다. 연못을 바라보고 서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야무지다.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해서 명옥헌(鳴玉軒)이라고 했다던가? 녹음 속에 잠긴 나무들이 재잘거리며 세상을 색칠한다.

그림자도 쉰다는(息影) 정자 식영정은 높은 언덕 위에 있다. 그냥 가라고 등을 밀어도 쉬어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조선 명종 15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이 정자 역시 정철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성산별곡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철은 이곳 성산에서 머물면서 성산별곡 외에도 식영정 20영과 식영정잡영 10수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소쇄원 들어가는 길의 대숲은시원한 바람으로 객을 반긴다. 정원을 조성하며 자연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물을 막지 않고 쌓은 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큰 구멍을 내고 쌓은 담 밑으로 막힘없이 흐르는 냇물이 소쇄원을 살아있게 하는 원천이다. 인공구조물을 배제하지 않되 계곡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서 정원을 꾸몄다.

제월당 마루에 앉아 땀을 들인다. ‘비 갠 뒤 하늘의 맑은 달’을 뜻한다는 이름의 이 소박한 건물은 주인이 거처하며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 광풍각으로 내려가다, 배롱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한 돌담에 시선이 머문다. 나는 소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광풍각 왼쪽 마당에서 올려다본 이 담장을 우선으로 친다. 세 갈래로 뻗은 늙은 배롱나무를 위해 담은 허리를 끊었다.

소쇄원에서야말로 천천히 음미하듯 걸을 일이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까지 선비의 이상을 담았다니 그 뜻이 스밀 때까지 기다려 볼 일이다. 소쇄원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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