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 '모유수유 서약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머니투데이 진달래 기자 | 2018.06.18 14:37

일부 보건소 서약 권장, 강제 아니지만 부담…임산부에게 죄책감 심는 문화로

일부 보건소에서 쓰는 모유서약서 내용을 참고로 만든 예시/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임신 11주차에 보건소를 찾은 한성희씨(34·가명)는 임산부 등록과 무료 검진 과정에서 ‘모유수유 서약서’를 받았다. 문진표 서류 뒤에 놓인 서약서에는 ‘나는 내 아기를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건강과 사랑의 결정체인 모유를 먹일 것을 서약합니다’라고 적혔다.

아무런 설명도 못 들은 한씨는 은행에서 개인정보 수집 동의하듯이 필수냐고 물었다가 “왜요? 모유수유 안하실거에요?”라는 직원의 답을 들었다. 갑자기 시작된 모유수유 설명은 5분이 넘어갔고 한씨는 검진을 받기 위해 온 임산부 대기자 줄이 길어진 것을 보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 결국 서명을 했다.

서울 25개 보건소 중 일부가 임산부에게 모유수유 서약서 작성을 권고하고 있다. 전국 보건소가 무료 지원하는 산점검사를 받기 위해 온 임산부에게 모유수유를 홍보하기 위한 취지다. 서울 외 지역에서도 보건소에서 서약서를 작성하고 물수건, 손수건 등 소정의 용품을 받았다는 경험담이 여성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블로그, 카페 등에는 종종 올라온다.

모유수유 서약서를 권장하는 서울시내 한 보건소 관계자는 “아기와 엄마의 건강을 위해 좋은 모유수유를 임산부에게 알리기 위해서 모유수유 서약서를 권장하는 것”이라며 강제가 아니라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국내 모유수유 비율이 최근 30%에서 20%대로 내려갔는데 이를 높일 수 있도록 홍보한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취지와는 달리 일부 임산부들은 당혹감을 표시한다. 정부기관인 보건소에서 서약서 작성을 권고하는 것은 임산부에게 모유수유 의무를 지우는 듯한 느낌이라는 설명이다. 정확한 모유수유 정보를 알리고 원하는 임산부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설명도 없이 서약서 작성을 권고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의견이다.

한씨는 “모유수유는 지극히 개인 선택 문제인데 보건소가 서약서를 받는 게 이상했다”며 “더군다나 임산부가 의지가 있으면 모유수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서약서 문구를 읽어보니 마치 모유를 먹이지 않으면 사랑을 주지 않는 엄마인 것처럼 돼 있어서 거부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서약서 문구가 모유수유를 하지 않는 여성에게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도 문제다. 건강 상황에 따라 모유 수유가 어려울 수도 있고 일터로 복귀해야 하는 워킹맘 경우에는 오랜 기간 모유를 먹이는 게 사회 여건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둘째를 출산한 이연수씨(33·가명)는 “첫째를 낳고 보니 모유수유를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마다 상황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며 “산후조리원에 가보면 신체 건강 이유로 모유수유를 못해서 우는 임산부들도 많다”고 전했다. 출산 과정에서 만나는 보건소, 산후조리원 등 관계자들의 일방적인 모유수유 권장으로 임산부가 강박증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보건소의 모유수유 서약서 사례는 출산·육아 문제에 대해 임산부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 시각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여론의 뭇매를 맞아 없앴던 행정안전부의 ‘출산지도’(전국 가임기 여성 수를 지방자치단체별로 표시하고 지역별 순위를 명시한 지도)와 같은 맥락이다.

여성단체는 정부가 임신과 출산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하도록 여성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는 있지만 서약서라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과거 의료기관이 제왕절개를 필요 이상으로 권했던 사례와 그런 경향을 바꾸려는 움직임 등에도 여성 당사자의 건강에 대한 고려는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며 “임신·출산 과정 전반에서 여성이 태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생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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