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체인가 객체인가”…삭제된 기억으로 만나는 ‘실존’의 물음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 2018.04.28 06:16

[따끈따끈 새책] 머니투데이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에셔의 손’

우리는 주체이면서 객체다. 어떤 반응에 의해 객체적 주체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기억과 경험으로 주체적 객체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구분에 민감하지 않거나 무관심했을 뿐이다.

‘전뇌’(전자두뇌)가 대중화한 시대에 기억을 화두로 주체이거나 객체, 주·객체가 뒤섞인 이들이 쫓거나 쫓긴다. 기억을 지우는 자(진), 기억을 뒤쫓는 자(현우), 기억을 거부하는 자(수연), 기억에 고통받는 자(미연), 기억 자체를 없애려는 자(섭리)들이 얽히고설켜 정체성의 실마리를 풀어헤친다.

‘에셔의 손’은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유명한 작품 ‘그리는 손’에서 따온 모티브처럼, 어느 손에서 그림이 시작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각 인물이 지닌 주체의 모호성을 그린다. ‘일곱 사도 사건’이라는 대규모 폭탄 테러 이후 기억이 삭제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테러를 일으킨 1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범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누군가 12명의 전뇌를 해킹해 테러를 일으켰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지만, 전뇌 제작사인 E-뉴로테크는 전뇌 해킹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발표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머릿속이 깨끗이 지워진 환자들이 나타나면서 E-뉴로테크는 ‘기억을 뒤쫓는’ 현우에게 도움을 청하고, 현우는 ‘기억을 지우는’ 진을 추적한다.

작품은 거대한 서사시를 보듯 다면체적이고 복잡하다. 각 인물이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스토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듯 촘촘하고 이를 풀어내는 구성은 영화 ‘추격자’를 방불케 할 만큼 긴장감이 넘친다.

순수문학에선 저마다 다른 뇌의 기억을 전자기판의 복잡한 회로처럼 엮은 SF 구성에 탄복할 듯하고, SF(공상과학소설) 계에선 단편적 해설이 아닌 감성과 묘사로 다진 문학적 터치에 입을 다물지 못할 듯하다.

머니투데이 주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분 대상에 꼽힌 이 작품에 심사위원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박상준 SF아카이브 대표는 “주제나 스토리텔링, 문장 등 문학작품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품격이 미래 과학기술적 전망이라는 SF적 디테일과 훌륭하게 융합됐다”며 “실존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화두를 SF로 재형성하는 데 이 작품만큼의 성취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심사위원 김보영 작가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수준이 월등하다”고 했고, 김창규 작가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 양방향으로 확장하는 방법에서 능숙함이 돋보였지만, 여백이 필요한 자리까지 이미지와 설명이 차지한 점은 옥에 티”라고 평가했다.

죽음과 다름없는 삶의 과정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모호한 정의이듯,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우고 ‘부팅’을 통해 시작한 새 삶은 모호한 객체에서 주체를 찾는 시작이라는 점에서 작품은 ‘기억’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전뇌 회로를 만드는 사람의 이식 작업으로 시작해 에셔의 손처럼 숫자가 늘어난 전뇌 설계도. 회로로 연결된 삭제된 기억들에서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일까.

저자인 김백상 작가는 1년 만에 초고를 써놓고 8년간 퇴고를 거듭했다. 대학 시절 녹내장 판정을 받고,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시는 우여곡절에도 그는 글쓰기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는 내내 ‘그리는 손’을 떠올렸다. 나는 이야기에 끌려 자판을 두드렸고 이야기가 막히면 내가 활로를 모색했다. 그것은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 알 수 없는 황홀한 춤이었다”며 “길고 고된 여정이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소설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에셔의 손=김백상 지음. 허블 펴냄. 408쪽/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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