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물결 앞에 선 칼 라거펠트

박세진(패션 칼럼니스트) ize 기자 | 2018.04.26 09:03
ⓒShutterstock
칼 라거펠트는 1933년 함부르크 출신으로 현재 샤넬, 펜디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인 칼 라거펠트를 이끌고 있다. 이분은 이끌고 있는 브랜드의 매출과 명성만큼이나 종교, 인종과 인권 등과 관련해 많은 논란을 만들어왔는데, 특히 2010년 이후를 보면 조금 재미있다.

2010년에서 2013년 사이에 그는 가수 아델에게는 너무 뚱뚱하다고 했고, 피파 미들턴(영국 왕세자비 케이트 미들턴의 동생)에게는 못생겨서 뒷모습만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모델 하이디 클럼에게는 몸이 무거워 보이고 가슴도 너무 커서 런웨이 모델로 쓸 수 없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너무 마른 모델 문제가 이슈가 되자 뚱뚱한 모델이 보고 싶겠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패션계의 상황이 조금씩 변했는데, 2013년 말 영국 ‘엘르’는 페미니즘 쇄신 캠페인을 시작했다. 몇 개의 여성 운동 단체와 몇 개의 광고 기획사를 짝지어 페미니즘에 대한 이미지 쇄신을 시도했고 “This Is What Feminist Looks Like”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유명인, 정치인 등에게 입혔다. 말하자면 패션 쪽에서 가장 잘하는 방식, “이런 게 멋진 거야”를 씌운 거다.

물론 모두 저 캠페인 덕은 아니겠지만, 시발점 중 하나의 역할을 해낸 건 분명하다. 이후 페미니즘은 트렌드로 자리매김했고, 2014년 봄에 있었던 패션 위크에서는 많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리뷰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같은 해 가을 엠마 왓슨의 UN 연설도 있었고, ‘FEMINIST’라는 커다란 전광판을 세워놓은 비욘세의 VMA 공연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칼 라거펠트는 갑자기 2014년 가을, 샤넬 패션쇼에서 페미니즘 시위를 재현한다. 지젤 번천이나 카라 델라빈 같은 모델들이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캣워크 위를 걸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사실 페미니스트라면서 드센 페미니즘은 별로지만 “가벼운 마음”의 페미니즘을 좋아한다는 둥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언급도 덧붙였다.

하지만 하이패션의 페미니즘 트렌드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다. 이 산업은 기존 권력에 기대어 제품을 만들고, 팔고, 구입한다. 그와 동시에 만들고, 팔고, 구입하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여성 그리고 성소수자, 이민자 등이다. 완전한 진정성 같은 건 물론 없겠지만 동시에 완전한 상업성만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자리에 당사자가 있고 또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영향을 받는다.


아무튼 페미니즘 트렌드는 캠페인 티셔츠에서 시작해 디올이나 프라발 그룽의 정규 시즌 컬렉션까지 왔다. 그리고 2017년 10월 하비 와인스틴 성추문 폭로에 이어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흐름의 또 다른 축으로 모델 협회가 있다. 모델 출신인 새러 지프가 모델의 권익 보호를 위해 2012년 결성한 단체다. 모델은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패션을 둘러싼 디자이너와 모기업, 바이어, 패션 에디터, 유명인, 광고 회사 등등 사이에서 최약체다. 직업은 불안정하고 불합리한 일도 자주 일어나고 성희롱 문제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

모델 협회는 특히 하비 와인스틴 추문 이후 빠르게 움직였다. 노동 조건과 표준 계약 등 모델에 대한 법적 보호, 모델의 권리에 대한 교육,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최종 책임자의 문제 등을 이슈화했고 몇 가지는 법안으로 제출했다. 특히 모델 협회는 미국을 기반으로 하지만 비슷한 조건을 LVMH나 케링 같은 유럽의 패션 대기업들이 준수하도록 합의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전 칼 라거펠트의 잡지 인터뷰가 있었다. 그분은 미투가 지긋지긋하고, 포즈를 취할 때 물어봐야 하고 타인의 손이 닿는 게 싫은 모델은 수녀원이나 가라고 말했다. 여전한 허튼소리가 하나 더해졌을 뿐이겠지만, 위에서 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의 생각과 태도는 이제 달라졌다.

모델 협회의 노력으로 패션 위크 백스테이지에 개인용 탈의실이 올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불공정한 관계와 비정상적인 직업 환경의 문제를 개선해보자는 논의가 이제야 겨우 출발점에 선 거다. 패션을 이끄는 힘인 다양성은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고 그건 캣워크 위의 플래카드나 티셔츠 위의 문구로만 실현되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분야도 불합리한 희생과 침묵의 강요를 기반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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