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에 빛바랜' 수양대군을 알려주는 세가지 에피소드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4.21 05:00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1 – 수양대군 : 패륜에 빛바랜 왕의 나라



‘공이 있으면 조(祖)라 하고, 덕이 있으면 종(宗)이라 한다.’

옛날 동양에서는 군주가 세상을 떠나면 묘호(廟號)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오늘날 한국인이 알고 있는 조선시대 임금 명칭이 바로 그 묘호다. 묘호를 지을 때는 유교 종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원래는 나라를 세우거나 이에 준하는 공이 없으면 ‘조(祖)’를 쓰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전례를 깨고 죽은 뒤에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받았다. ‘나라를 새로 창업한 공’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1453년 10월 10일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이유가 움직였다. 그는 당대의 권력자인 좌의정 김종서부터 제거하고 어린 조카 단종을 위협해 신하들을 소집했다. 살생부에 오른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등이 입궐하다가 철퇴를 맞았다. 안평대군 이용도 유배를 떠나 사약을 받고 죽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바야흐로 수양대군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수양대군을 다룬 사극들은 대체로 이 계유정난에 초점을 맞춘다. ‘정난(靖難)’은 난리를 평정한다는 뜻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일파가 단종을 몰아내고 안평대군을 즉위시키고자 했는데 자기가 제압했다고 밝혔다. 이 뻔뻔한 ‘역발상’은 알고 보면 벤치마킹의 산물이다.

1452년 9월 수양대군은 사신이 되어 북경으로 향했다. 명나라가 단종을 국왕에 책봉한 데 대한 답례로 사행길에 오른 것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가 조카의 왕좌를 넘본다고 의심했다. 수양대군은 사절을 자청함으로써 그 의혹을 불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북경에서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이유는 사신 임무를 마친 뒤 영락제가 묻힌 장릉을 찾아갔다.

‘정난’은 사실 1402년 연왕 주체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 내건 구호였다. 난리를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연왕은 건문제 주위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대신들에게 칼을 겨눴다. 수양대군 입장에서는 단종을 끼고 권력을 휘두르는 김종서 일파가 겹쳐졌을 것이다. 연왕, 즉 영락제가 그랬던 것처럼 난리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치면 조카의 보위는 내 것이 되리라. 장릉에서 그는 영락제의 유지를 음미했다.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히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먼저 김종서 등 대신들을 죽인 다음 친형제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의 목숨을 빼앗았다. 단종도 비정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럼 수양대군은 어째서 왕이 되고자 했을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이런 패륜을 저질렀을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466년 8월의 일이다. 예문관 관리 김종련이 세조 앞에서 ‘논어(論語)’를 강론하다가 주자(朱子)의 ‘태극설(太極說)’에 대해 언급했다.
“주자의 말 가운데는 틀린 곳이 많습니다. 신이 왕명을 받들어 아뢰려고 하지만, 천하의 공론(公論)이 두려워 비난하지 못할 뿐입니다.”

“틀린 곳이 있다고 말해놓고, 어찌 공론을 두려워하는가? 공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임금이 갑자기 질문을 던지자 김종련은 당황하여 허둥지둥 둘러댔다.
“무릇 유자(儒者)들에게는 모두 공론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이 어릴 때부터 배운 바를 하루아침에 훼손한다면 유자들이 신을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유자들은 모두 공론이 있다고 했겠다. 그럼 조정의 대신들도 유자이거늘, 그대는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왕은 그 두렵다는 유자가 누군지 계속 물었다. 심지어 의금부에서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세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왕명보다 유자들의 여론을 의식하는 김종련의 자세였다. 유자, 즉 유학을 배운 사대부가 임금보다 두렵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김종련은 그해 12월 참형에 처해졌다. 왕은 본보기를 보이고자 했다. 유자들도, 대신들도 임금 위에 존재할 수 없음을 과시하려 했다. 세조는 과거 김종서가 황표정사(黃標政事 : 관리 임용 후보의 이름에 노란색 표식을 해 임금이 낙점하게 한 일)를 통해 국왕의 인사권까지 침해한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왕권에 매달렸다. 아버지 세종이 철폐한 육조직계제를 다시 시행한 것도 그래서다.

공신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세조는 정변을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많은 특혜를 줬다. 엄청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는가 하면 뇌물을 받거나 사람을 죽여도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충성한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그는 끊임없이 측근들의 충성을 의심했다. 최대 공신이자 정권의 기둥인 한명회와 신숙주도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조는 종종 측근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격의 없이 나랏일을 의논했다. 한번은 신숙주가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장난을 쳤는데, 그날 밤 한명회가 사람을 보내 일찍 자라고 권유했다. 신숙주는 술을 많이 마셔도 꼭 책을 읽고 자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명회가 권고하자 짚이는 게 있었는지 독서를 거르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밤중에 궁궐에서 내관이 나와 신숙주의 동태를 살폈다. 세조는 신숙주의 장난이 찜찜했던 것이다. 그가 자고 있으면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려니 하겠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멀쩡한데 고의로 욕보인 게 아닌가. 왕의 권위를 중시하는 세조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명회 덕분에 신숙주는 호된 벌을 피했다.

그러나 세조가 추구한 왕의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146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훈구파의 나라로 전락했다. 나라를 새로 창업한 공도 퇴색했다. 훗날 사림이 등장해 수양대군의 패륜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공은 물거품처럼 반짝하다가 허공에 흩어졌다. 역사에서 지어낸 공은 유통기간이 길지 않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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