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오픈'된 사무실에서 성관계를…품위 문제 없다고요?"

머니투데이 박보희 기자 | 2018.04.17 05:00

[the L][서초동살롱] "성폭력 범죄 바라보는 법조계 안이한 인식…피해자 중심으로 바뀌길"


"자신의 변호사실에서 문을 닫고 성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현저하여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어 기각한다." (서울변호사회 진정처리결과 통보서 중)

통보서를 받아든 A변호사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A변호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요.

사건은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말에 출근을 한 A변호사는 우연히 옆 사무실에서 B변호사가 성관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무실 문에는 창문이 있어 안이 훤히 보이는데다 출입문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던터라, 벌써 5시간째 근무 중인 자신이 없다는 것을 모를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일이 일어나자 더욱 충격을 받았는데요. 사건 관련 증인 상담을 앞둔 A변호사가 당황해 경비실에 상황을 알리는 사이 B변호사는 신원미상의 여인과 사무실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A변호사는 자신이 옆 방에서 근무 중인데다 내부가 보이는 사무실에서 성관계를 한 것은 자신에 대한 성희롱은 물론 변호사로서 품위유지 의무를 저버린 것으로 판단, 서울변호사회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서울변회 조사가 시작되자 B변호사는 "그런 일은 없었다"며 "외부에서 방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인데 성행위를 봤다니 거짓말"이라고 펄쩍 뛰었는데요. 조사 결과 실제 변호사실 문에는 창문이 있어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있는 구조였고, 각 변호사실은 서로 벽을 맞대로 있어 방음에 취약한 구조였다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서울변회 측은 "(A변호사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과 당시 상황에 대한 일관되고 자세한 진술 등을 비춰볼 때 (B변호사가) 성행위를 했다는 강한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변호사 품위 유지를 위반했다고 단언하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A변호사의 진정이 접수된 지 7개월여 조사 끝에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됐는데요.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지만, A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조계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사법 구제를 위해 찾은 수사기관과 변호사 상담 과정, 그리고 법원에서 2차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폭력 피해 상담을 위해 변호사를 찾은 경험이 있는 한 피해자는 "피해자 변호는 돈이 안되는데가 일은 많아 별로 맡고싶지 않다는 식으로 대놓고 말하고, 고소를 해봤자 무고로 역고소 당할 수 있으니 그냥 넘어가는게 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법정에서는 더한 일도 생깁니다. 성폭력 피해자로 법정에 선 경험이 있는 한 피해자는 "가해자 변호사들이 다 그렇겠지만 '주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평소 옷차림이 야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헤픈 여자라더라'는 식으로 비난하며 '꽃뱀 아니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는데 왜 피해자인 내가 대놓고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참기 힘들었다"고 분노했습니다.

변호사인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다 못해 회사를 그만둔 피해자도 있습니다.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던 피해자는 상사인 변호사의 음담패설과 각종 성희롱을 견기다못해 고소를 해 승소 판결을 받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상사인 변호사는 다른 로펌으로 이직을 해 여전히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성폭력 가해자인 변호사가 다른 성폭력 사건 변호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겁니다.

이런 가운데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 가해자나 일반인의 시각보다 피해자의 심정과 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변화'의 희망이 엿보였는데요.

대법원은 지난 12일 학생들을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해임당한 대학 교수가 낸 해임 취소 소송에서 "해임이 정당하지 않다"는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이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채 은연 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렸다"며 "성희롱은 사회 전체의 평균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성희롱 사건에서 2차 피해 등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심리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최초의 판결로 기록됐습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향후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의 심리와 판단이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판단돼야 한다는 획기적인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가장 마지막에 기댈 수 있는 곳은 결국 '법'입니다. 피해자를 구제하고, 피해자를 일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이들은 역시 법률가일 겁니다. 당장 한 번에 모든 것이 바뀔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다만 이번 대법원 판결을 시작으로 법조계 전반의 '성 감수성'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는 계기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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