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찾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국가직·지방직을 비롯 임용·경찰·소방 공무원 등 다양한 학원이 밀집해있는 거리는 적막이 감돌았다. 얼마 전 서울시 지방직·국가직 시험이 끝났지만 후련함 보다는 씁쓸함이 남아서다. 이들은 하나 같이 못 맞추는 공시 문제가 나왔다며 허탈해했다.
지난 7일 9급 국가직 시험을 치른 수험생 황모씨(29)는 "황당할 정도로 지엽적인 문제가 많이 나왔다"고 말문을 뗐다. 그는 2013년부터 6년째 '9급 국가직'을 준비해오고 있다. 그는 "예컨대 한국사의 경우 연도를 하나하나 외워야하는 문제가 나온다"고 지적하며 한국사 시험 문제 18번을 예시로 꼽았다.
수험생들이 헷갈린 선지는 ①유엔의 지원으로 충주에 비료공장을 설립했다(1959년)였다. 황씨는 이런 지엽적인 문제가 "공부를 오래해 한국사를 잘 이해한 사람과, 하나도 공부하지 않고 시험치는 사람 모두에게 어려워 오히려 변별력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7급 서울시 지방직 필기시험을 치른 이모씨(27)도 "국사든 행정학이든 알아야하는 건 맞지만 이 정도까지 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면서 "너무 지엽적"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시생들은 다 공부할 수 없이 몇 문제는 운에 맡긴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9급 국가직 수험생 박모씨(27)는 "문제 전부가 지엽적인 것은 아니니 열심히 공부하겠지만, 지엽적으로 나오는 한 두 문제는 그냥 운에 맡긴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엽적 공무원 시험, 무엇이 문제?
역사학자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난달 7급 서울시 지방직 한국사에 출제된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 "응시자들이 승복할 수 있는 어려움이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수험생들의 학습 의욕을 꺾는다"고 말했다.
해당 문제는 고려시대 역사 서적 4점이 제작된 순서를 맞히는 것이었는데, 문항 보기 중 '고금록'(1284년)과 '제왕운기'(1287년)의 제작 시기가 겨우 3년 차이에 불과해 역사학 교수도 맞출 수 없는 문제로 꼽혔다. 공시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는 전한길 강사도 "시험이라는 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똑똑한 학생을 합격시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떨어뜨리는 건데, 이 문제는 공부해도 맞힐 수 없는 문제로 변별력이 꽝"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문제를 두고 '출제자의 갑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도 현재 공무원 시험의 타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공무원 시험을 위해 공부한 많은 내용이 직무와 연관이 없으며, 과하게 지엽적이라서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에 인사혁신처 시험출제과 관계자는 "공무원 채용 시험의 경쟁률이 매우 높은 만큼, 변별력 강화를 위해서 난이도를 높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출제위원들의 입장에선 지엽적인 게 아니라 그저 '난이도'가 높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어 "출제위원과 수험생들이 체감하는 난이도가 매우 달라, 수험생 출신 시험 검토위원의 수를 2배 정도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면접 강화' '인턴 후 전환' '서술형 대체' 등 다른 대안 없을까
전문가들은 다른 선진국들은 공무원을 뽑는 과정에서 암기식 필기시험을 지양하고 직무수행 과정 필요한 능력을 평가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우리나라도 변화를 모색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이종범은 자신의 저서 '지식정부를 위한 고시제도 개혁'에서 △영어 기본점수와 대학 총장 추천·면접 등을 통한 임용 후보자들과 고시시험을 통과한 임용 후보자들이 함께 인턴과정을 거친 뒤 선발되는 내용의 개선안이나 △프랑스의 국립행정대학원(ENA)처럼 고위공무원을 양성하는 기관을 도입해 임용 전교육을 강화하고자 하는 개선안 등을 제시했다.
권경득은 '행정인턴쉽 프로그램의 도입·운영에 관한 시론적 연구' 논문을 통해 미국에서 행정인턴십을 제공하는 기관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학생들을 고용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으로 유능한 인턴을 채용한다고 밝혔다.
필기시험 서술형, 면접전형 강화, 인턴십 등 다양한 대안도 제시되는 상황. 9급 국가직 수험생 김태연씨(22)는 "객관식 문제 자체의 한계로, 임용고시처럼 서술형으로 갔으면 좋겠다. 변별력도 높아지고 깊이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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