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게임도 좀 하고 그래라

dcdc ize 기자 | 2018.04.02 09:03
“베네치오 델 토로라면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았을걸?” ‘레디 플레이어 원’을 같이 본 친구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오타쿠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맛이 담백하다. 오타쿠의 문화적 레퍼런스가 숱하게 제시되지만 내러티브에는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버워치’의 트레이서든 ‘사탄의 인형’의 처키든 어느 장면에 어떤 캐릭터가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역할만 배당받았을 뿐이다.

연출도 마찬가지다. 만약 오타쿠가 건담 RX-78을 헐리웃 영화에 등장시킨다면 ‘기동전사 건담’ 1화 수준의, 이제 와서 보기에는 느릿느릿하지만 원작에는 충실한 형태로 재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을 터이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오타쿠적 재현의 욕구 없이 해당 장면에 있으면 좋을 연출만 제시한다. 레퍼런스는 구현하지만 내러티브와 연결되지 않고 원본에 얽매이지도 않는 이 겉핥기식 소비에서는 게임을 직접 체험한, 동세대를 영위한 것이 아닌 위키에 적힌 트리비아만 줄줄이 외운 문화 소비자들을 볼 때의 위화감이 느껴진다. 주인공 Z(타이 쉐리던) 역시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선대의 오타쿠 할리데이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위키를 탐독하지 않던가?

위키로만, 스트리밍으로만 게임을 접하는 문화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계산적으로 오타쿠 레퍼런스를 활용하는 방식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기 체험을 재현하는 데 급급한 오타쿠라면 이렇게나 매끄러운 결과물을 완성하지 못했을 터이다. 문제는 이 작품이 체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창작물이 흔히 저지르는 헛발질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Z는 게임에서 만난 여성형 아바타 아르테미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르테미스가 실은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이름은 척인 30대 남성이면 어쩔 것이냐”라는 친구의 염려에 Z는 그럴 리 없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올바른 답은 “그래도 상관없다”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바타’에서 과학기술을 통해 인종적,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세상을 긍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 온라인을 오프라인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폐쇄적인 영역으로만 다룬다. 이러한 폐쇄성은 토미노 요시유키나 안노 히데아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타쿠적 소재를 활용한 작품 속에 작품에서 벗어나 현실로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온 묘사였다. 하지만 21세기의 온라인은 오프라인과 괴리된 무엇이 아닌, 말 그대로 오프라인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게임은 이미 소설이나 만화 그리고 영화와 달리 개인과 개인을 연결 짓는 형태로 진화했다. 마치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카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고 페이스북으로 정치를 하며 트위터로 연대하는 시대에서 화면을 끄고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메시지는 어떠한 울림도 주지 못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소심한 오타쿠 남성이 가진 한계를 넘어 성장하길 요구한다. 멀리는 게이머게이트, 가까이는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과 imc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건을 목격한 이라면 당연히 이 문제의식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벗어나 오프라인으로 나아가라는 이 작품의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때 많은 이들이 일베 유저들을 오프라인에 나와서는 아무것도 못할 루저라 무시했지만 그 구성원 중에는 국회의원이나 의사처럼 권력을 가진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 등장했을 때 벌어진 일은 세월호 유가족을 비웃는 폭식 투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고작 화면을 끄고 세상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난다고 해결되리라 믿는다면 그건 그저 문제를 키우기만 하는 꼰대 같은 훈수일 뿐이다.

이제는 오프라인이 온라인에 비해 어떤 우위를 갖고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가상현실기술이 발전하면서 관계가 역전되면 모를까, 둘은 이미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온라인의 무질서가 오프라인에 번지는 만큼이나 온라인의 투쟁으로 오프라인을 개선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둘은 이미 하나다. 우리는 화면을 끄고 사람을 만나는 법이 아닌, 화면 너머에도 사람이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학습해야 한다. 서로의 피부에 맞닿지 않더라도 그 온기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 존중에 대한 학습은 온라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부딪히고 싸워나가며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와 규범이 무엇인지 성찰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보다 밝고 명랑한 건전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밖에 나가 놀지만 말고 집에 박혀 게임도 좀 하고 그럴 필요가,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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