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티븐 호킹

곽재식(화학자/작가) ize 기자 | 2018.03.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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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 중 1989년 1월의 기록을 살펴 보면, 가장 먼저 배치 돼 있는 것은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다. 당시 가장 잘 팔렸던 책은 이문열 작가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였다. 지금은 그때 만큼 인기가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제목만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고, 당시에는 인기를 타고 영화화 되기도 했다. 소설이 문화계의 대표적인 화제가 되고, 그에 대한 기사가 신문 지면의 제법 많은 양을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한편 1980년대말은 1987년 민주화 열풍이 가시지 않은 때로, 소위 말하는 “해금 열풍”을 타고 그 동안 발표되지 못했던 자유로운 사상과 의견을 다룬 글이 폭발적으로 풀려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들이나 정치 비판 서적이 거침 없이 출판되는가 하면, ‘주간만화’와 같은 만화 잡지에서도 독자 투고 만화란에도 항상 정치 풍자 만화가 실리곤 했다. 그때 당시에는 "경제 경영 자기개발"이나 "과학 교양"과 같은 분류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 목록의 분류는 "인문" 부분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1989년 1월의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에 좀 뜬금 없는 책이 올랐다. 바로 블랙홀과 우주의 처음에 대해 다룬 스티븐 호킹의 저서, ‘시간의 역사’였다.

1970년대부터 블랙홀이 인기 있는 소재이기는 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함정처럼 묘사되는 블랙홀은 우주를 모험하는 활극 주인공이 나오는 SF물에서 자주 나왔다. 한국에서도 70년대말에 나온 어린이용 SF 애니매이션 ‘별나라 삼총사’ 등에서 블랙홀을 흔한 소재로 다룰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영화 ‘ET’와 ‘스타워즈’ 시리즈, 일본 로봇 애니매이션들, 전자 오락실의 우주를 배경으로한 게임들과 ‘맥가이버’와 ‘V’ 같은 미국 TV 시리즈로 대표되는 80년대 SF 붐이 일어 나면서 블랙홀 같은 우주 이야기는 더욱 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에 세계적으로 1천만부가 넘게 팔린 인기작 ‘시간의 역사’가 출간되자, 블랙홀 연구의 핵심 인물이었던 스티븐 호킹이 한국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어판 ‘시간의 역사’는 스티븐 호킹이 이 책을 출판한 바로 그 해인1988년 현정준 번역으로 소개 되었다. 현정준 교수는 서울대 최초의 천문학 교수로 학계의 거물이었는데, 이 책의 출간 이후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시간의 역사’ 번역판은 핵심적인 주제를 훑는 구성에 스티븐 호킹의 독특한 매력까지 더해진 까닭에 한국에서도 제법 잘 팔려 나갔고, ‘시간의 역사’ 번역판이 베스트셀러가 된 1989년이 되자 빅뱅이라든가, 블랙홀이라든가 하는 말은 유난히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해에는 SF 연극 ‘블랙홀의 전설’이 국내에서 만들어져 전광열 배우와 윤유선 배우 주연으로 황정순 극장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이 같은 인기 때문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0년에 스티븐 호킹은 한국을 찾게 되었다. 당시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한국에 도착한 스티븐 호킹은 이어령 전 장관과 고건 전 총리와 식사를 같이 했고, 서울대에서 학생과 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번 했으며, 신라 호텔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또 한 번 강연을 했다고 한다. 서울대 강연에서는 2천명 가량의 청중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 정도 숫자가 모이는 과학 강연은 지금까지도 좀체로 보기 드문 것이다. 신라 호텔에서도 1천명 가량의 청중이 모였다고 한다. 강연이 시작되자 스티븐 호킹이 연단에 올랐고, 특유의 컴퓨터 합성 목소리로 “제 목소리가 잘 들립니까?”라고 묻자, 모든 청중들이 일제히 “예-”라고 대답하며 환호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신 없는 정치 상황과 사회 변화에 시달리면서 오늘 어떻게 회식에서 빠져 나올 것인가와 월말에 돌아 오는 대출금 사이의 고민 속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경우가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중에 스티븐 호킹은 뜬금 없이 우주 저편에 있는 중력의 특이점이나, 시간의 시작에 대한 고민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그 순간, 우리는 먼지 바람 가득한 세상 바깥에서 빛나는 어떤 순수한 신비 같은 것과 그것을 쫓는 꿈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고 믿는다.

28년전인 그 날, 남산 기슭에서 있었던 대중 강연에서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에 사람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같은 그야말로 SF 활극 같은 주제에서부터, 자신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인 호킹 복사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과학, 미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긴 생각을 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런 생각들이 삶의 영감이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잠깐 마음을 쉬어 가는 기회가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만한 추억이었던 만큼,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그때 청중들의 눈빛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삶에도 가끔씩 얼마간은 좋은 것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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