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언어학, '그와 그녀' 고백은 왜 다른가

머니투데이 최민지 기자, 김영상 기자, 이영민 기자 | 2018.03.14 16:27

심리학자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입력, 왜곡된 기억 갖고 있을 수도"

임종철 디자인기자

"합의한 관계였고 강압이나 폭력은 없었다."

미투 폭로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내놓는 '단골 해명'이다. 낯설지 않다. 과거에도 성폭력 주인공들은 흔히 이런 논리를 폈다. 왜 다들 이런 해명을 내놓을까.

가해자들이 '합의한 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선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가 상사인 것 외에도 강제성이 있었다는 게 입증돼야 한다.

신진희 변호사(성폭력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는 "성폭력이란 것 자체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합의 또는 묵시적 동의가 있다면 범죄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주장은 가해자들이 성관계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때 내놓는 수법"이라고 말했다.

발뺌이 아닐 수도 있다. 심리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정말로 '그날'의 성행위를 합의했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게 돼 있다"며 "피해자가 성관계를 거절했다 한들 가해자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뇌에 입력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기억을 왜곡하는 이유는 죄책감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가해자가 성폭력 당시 생긴 불편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가해자는 도덕적으로 미안하지만 법적 책임은 피하고 싶고 자신의 지위도 흔들리는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인격체로서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이 이뤄진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가족, 친구와 달리 자신과 전혀 다른 등급으로서 함부로 해도 되는 인간으로 분류한다는 의미다.

흔히 '딸을 둔 남성이 어떻게 딸 같은 피해자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지만 미투 폭로의 대상으로 지목된 가해자들은 가족(딸)과 피해자들을 철저히 분리해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수정 교수는 "미투 폭로의 가해자에게선 사회적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경우에만 절제력을 발휘하는 이중성이 엿보인다"며 "쉽게 말해 딸이나 아내와 달리 피해자들은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화이트칼라(사무직 노동자) 성범죄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자기애적 성향이 이러한 이중성과 결합 돼 교묘한 성범죄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겉으론 멀쩡하게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체면을 지키며 살아가지만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약한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아버린다는 얘기다.

그만큼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심리 연구 내용을 보면 피해 사실 자체에 대한 상처도 크지만 내 동료, 내 상사가 나를 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는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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