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잃어버린 얼굴과 이름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8.03.10 09:25

<142> 김연아 시인 '달의 기식자'


"대학원 떨어지고, 사법고시 떨어지고, 소설해서 떨어지고, 암벽하다 떨어지고, 한국문학학교 최승자 선생 반에서 시로 전향 이십 년. 결국 시가 나를 집어올렸다. 첫 시집 '달의 기식자' 상재."
200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김연아(1959~ ) 시인이 첫 시집 '달의 기식자'를 낸 후 페이스북에 적은 자기소개 글이다. 밤(어둠)은 나의 실체를 감춰주기도 하지만 내 안의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거나 왜곡해 보여주기도 한다. 밤의 상징인 달의 주기로 보면, 만월에서 점차 기울어지다가 그믐 이후 다시 차오르는, 즉 이것저것 다 떨어지고 난 암흑 이후 시를 쓰고부터 다시 밝게 차오른 삶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상승, 밤은 하강을 상징하지만 시인에게 밤은 추락이 아닌 비상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달은 추락한 그의 삶을 구원해준 시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왕은 백마의 울음소리를 먹고 살았다
백마는 백조를 보면 울었다
어느 날 백조가 죄다 사라져버리자
백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왕은 갑자기 늙어버렸다

"달이여 영원한 시간을 아는 달이여"
누가 백조를 불러와 말을 울게 할 것인가?

우리는 달의 기식자
하루에 밤을 먹어치우고
시간의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려 한다

그것은 유랑의 낱말
길 밖으로 벗어나
우연에 맡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끼의 목소리, 새의 모음 같은 것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음미하고
창궐하는 것

어둠의 빈 웅덩이, 달에서 오는 파동이
나에게 도달한다
백조처럼 길게 휘어진 목을 가지고
흰 종이에 씨를 뿌리기 위해
나는 행을 배열한다

내가 달에 기식하는 동안
달은 내 심장을 먹고 춤을 추었다
평생 마신 숨을 다 센 것처럼
나는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내 이름을 갖지 못한 울음은
내려앉을 둥지가 없는 백조와 같다
그것은 나와 허공 사이에서 무한하게 펼쳐진 채
바람을 삼키고 있다
- '달의 기식자' 전문

이 시는 밤과 어둠을 지배하는 달을 통해서 시적 영감을 얻고, 이미지를 떠올리고, 시를 쓰는 과정과 고충을 다루고 있다. 1연은 '윤타왕(輪陀王)과 백마'라는 불법설화의 내용으로, 왕이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기 전의 상황이다. 설화에서는 마명이라는 부처의 제자가 사라진 백조를 불러오지만 이 시에서는 "영원한 시간을 아는 달"이 신이고, "우리는 달의 기식자"다. 기식자(寄食者)란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지내는 사람이다. 즉 달의 식객인 우리는 "하루에 밤을 먹어치우고" 달의 시간 속에서 "유랑의 낱말"을 얻는다. 신(神)인 동시에 시(詩)이기도 한 달에 머무는 시인은 "유랑의 낱말"에서 시적 영감을 얻고, "이끼의 목소리, 새의 모음 같은 것"들을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둠의 빈 웅덩이, 달에서 오는 파동"을 감지한 시인은 "행을 배열"하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는 그냥 써지지 않는다. 하여 "평생 마신 숨을 다 센 것처럼" "엄청난 피로"가 금방 몰려온다. 시 한 편을 다 쓴다 해도 아직 "내 이름을 갖지 못"했기에 공허하고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죽은 여자가 남긴 한 마리 앵무새
괜찮아, 괜찮아, 라고 외치며

어두운 방 안에서 울고 있는

나는 다성적으로 소용돌이치는 시간,
나열된 고리를 가진
당신의 꿈에서 막 빠져나오는 낱말입니다

망상의 목록들을 가지고 당신이 말을 할 때
나의 이름으로 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장소가 아닌 곳에 도착한 이름,
언제나 불확실한 피부를 가지고
당신의 모든 언어와 기후들을 지난다

나의 주소는 이방인의 것
당신은 나를 노바디, 라 부른다

나는 달과의 혼혈로 태어난, 마라의 젊은 미망인이다

내 몸에 기숙하는 조상들, 감각들
나의 조국은 침묵이니, 보이지 않는 잉크로 말을 하고
나는 밤과 못과 모퉁이와 관계 있다

나는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만 낫는 병
젖꼭지를 찾는 아기의 입처럼 당신의 입술을 찾는다
어떻게 이 잠에서 깨어날까?
달의 체념은 새롭고, 꽃들의 망상은 반복되었다

내가 아무도 아니라면, 나를 더 많이 만나야 합니까?
오래된 골목이 내쉬는 한숨 같은 이름들

억양이 다른 어린애의 변덕으로
나는 계속 나를 지나간다
진열장 뒤의 텔레비전 화면은 망자의 새소리를 흉내 낸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당신을 잃는다
- '모자를 쓴 이름이 지나간다' 전문

시 '모자를 쓴 이름이 지나간다'에서 "나는 죽은 여자가 남긴 한 마리 앵무새"다. 나를 기르던 여자가 죽었는데도 "괜찮아, 괜찮아, 라고 외치며/ 어두운 방 안에서 울고 있"다. 괜찮다 하지만 결코 괜찮지 않은,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롱에 갇힌 앵무새는 자유가 없다. 앵무새가 하는 말도 죽은 여자에 의해 학습된 것이다. 앵무새를 기르던 여자가 죽었는데도, 조롱 안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임에도 "괜찮아, 괜찮아"를 외치는 것은 아이러니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이 아닌 "이방인의 것"이다. 언젠가는 탈출해 내가 살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를 지배하는 존재인 당신, "나는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만 낫는 병"을 앓고 있다. 자유를 잃은, 자유를 갈망하는 나는 병들어 있다. 이런 상황은 현실이면서 꿈이다. 현실과 꿈이 혼재되어 있는 아노미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내가 "계속 나를 지나"가야, "생각 속에서 한 번, 두 번, 스무 번을 건너가"(이하 'deep blue day') 봐야만 가능하다. 즉 나를 돌아보는 시를 많이 써야만 가능한 것이다.

달이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것처럼 시인은 지극히 소극적이다. 때론 체념적이고, 때론 절망적이다. 빛보다는 어둠에, 태양보다는 달에, 삶보다는 죽음에 더 깊이 천착한다. 그에게 "우울은 탕진할 수 없는 재산"이며, "깊고 비통한 쾌감"이다. 이는 '시인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내 얼굴을 잃었"기 때문이며, "내부적 사실과 외부적 현실의 혼례"에 기인한다. 말할 수 없는 상처와 내가 처한 현실로 시인은 밤(어둠)으로 숨어들어 별을 보고 음악에 빠진다. 희미하나마 빛이 존재하는 달에 머무는 시인은 여기서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를 반성하고, 불면의 밤을 보낸다. 또한 흰긴수염고래, 늙은 사진가, 앵무새, 백색 무용가, 심지어 거울로 변신하려 한다. 그에게 시는 잃어버린 내 얼굴과 이름을 찾는 일이며, 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인 셈이다.

◇달의 기식자=김연아 지음. 중앙북스 펴냄. 144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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