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주보다 폭군! ‘찰떡궁합’ 조선 부마 스캔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2.24 07:49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77 – 부마 : 악명을 떨치거나 오명을 쓰거나


‘관상’은 봤으니 이제 ‘궁합’을 볼 차례다. 궁합은 원래 전통혼례 절차 가운데 납채(納采)에서 행해졌다.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기재한 사주단자를 받으면, 신부 측에서 역술가로 하여금 두 사람이 잘 맞을지 점치게 했다. 그 점괘가 좋으면 택일단자를 신랑 측에 보내고 혼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화 ‘궁합’은 조선의 옹주가 신랑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옹주가 사주단자를 훔쳐 신랑 후보들을 직접 염탐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비의 딸을 ‘공주’라고 불렀고, 후궁의 딸은 ‘옹주’라고 했다. 공주든, 옹주든 왕녀가 혼례를 치를 때는 나라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양반가 자제들의 사주단자를 받았다. 물론 최종적인 간택은 왕과 왕비의 몫이었다.

‘부마’는 고구려 때부터 쓴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약칭으로서 임금의 사위에게 주어진 칭호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나 옹주에게 장가 든 부마에게 모두 ‘위(尉)’라는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공주와 결혼한 부마의 첫 벼슬은 종1품, 옹주와 혼인한 부마의 첫 벼슬은 종2품으로 차등을 두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실과 조정을 분리했기에 세종 이후부터 부마를 행정 관료로 기용하지 않았다. 부마는 나라에서 땅과 노비를 하사받는 등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양반사대부로서 업적을 쌓기는 어려웠다. 조선시대 부마 가운데 유명한 인물이 거의 없는 것은 그래서다. 가뭄에 콩 나듯 널리 알려진 부마는 악명을 떨치거나 오명을 쓴 이들이다.

풍원위 임숭재는 1491년 성종의 서녀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었다. 그는 간신 임사홍의 아들로 연산군 재위기에 악행을 일삼았다. 임숭재는 휘숙옹주보다 그 오라비 연산군과 찰떡궁합이었다. 폭군과 어찌나 죽이 잘 맞았는지 늘 임금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걸로 보아 나름 예술가였던 연산군과 통했던 모양이다.

오늘날 임숭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영화 ‘간신’의 그 채홍사다. 그는 ‘흥청’과 ‘운평’이라는 여성예인 집단을 육성하겠다는 명목으로 연산군에게 기생들을 여러 차례 바쳤다. 심지어 자기 아내도 폭군과 간통하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휘숙옹주와 연산군은 이복남매 사이였으니 만약 사실이라면 금수만도 못한 패륜으로 욕먹을 짓이었다.

임숭재는 연산군의 타락을 부채질한 원흉으로 꼽혔다. 또 관원을 마음대로 구타하고 다닐 만큼 권력을 누렸다. 물론 그도 조정에서 여러 번 탄핵 당했으나 폭군은 오히려 탄핵한 신하들을 벌주었다. 연산군은 임숭재를 정말 아꼈고 늘 가까이 두려 했다. 그의 집 주변에 있는 민가 40여 채를 헐어 창덕궁의 담과 맞닿게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임숭재는 1505년, 폭군 연산이 쫓겨나 죽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누릴 거 다 누리고, 휘두를 거 다 휘두른 삶이었다. 연산군은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여 다음과 같은 애도시까지 지었다.

“이제 누구와 함께 다시 즐길소냐 / 슬픔이 애절하여 뼈와 살을 에는 듯하구나 / 꾀꼬리와 나비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 멋대로 춘색을 자랑하며 웃고 지껄이네.”


임숭재가 희대의 간신으로 악명을 떨쳤다면 금릉위 박영효는 말년에 매국노라는 오명을 썼다. 그는 1872년 철종의 서녀 영혜옹주와 혼인해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옹주가 결혼 3개월 만에 요절하는 바람에 박영효는 불과 12살의 나이에 영구적인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 조선시대 부마는 왕녀가 일찍 죽더라도 재혼하지 못한다는 게 법도였다.

하지만 죽은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부마 박영효는 일약 조선사회의 명사로 떠올랐다. 당시 조선에서는 북학에 뿌리를 둔 개화사상이 퍼지고 있었다. 그는 맏형 박영교를 따라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신문명을 접했다.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사 유대치 등 중인 출신 개화사상가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청년기에 접어든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나랏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를 제작했다. 이 국기가 오늘날 태극기의 원형이다. 일본에 머물면서 그는 근대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교류했고 개화로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신념을 굳혔다.

이후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은 민씨 척족과 안동 김씨 등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가 잡고 있었다. 도로 정비, 출판 활성화, 신식군대 도입 등 그의 개혁 시도는 번번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영효는 단숨에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전복하기로 마음먹었다.

1884년 그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거사 계획은 부마 박영효의 집에서 세워졌다. 그들은 일본군을 동원하여 수구대신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유폐한 후 정권을 차지했다. 개화당이 제시한 14개조 정강에는 자주적인 근대국가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힘을 빌린 것은 큰 실수였고 두고두고 우환으로 남았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에 그치며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김옥균 등 동지들이 암살당하는 가운데 그는 귀국과 망명을 거듭하며 부침을 겪었다. 여전히 왕실의 일원이었지만 친일파 낙인이 찍혔고, 고종과도 척을 졌다. 박영효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친일과 우국의 경계에서 갈지자 행보를 이어갔다.

1907년 박영효는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양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떠났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 그를 회유했고 망국 이후에는 후작의 작위를 내렸다. 일제 치하에서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며 193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부마는 이용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권경률 기고가(사극속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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