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 2018.01.20 10:25

<135> 이해존 시인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묘사의 구체성이 그림으로도 가능하겠다. 화자는 통신선을 통해 공급받지 않으면 전파기기 사용이 불가능한 난청지역에 주거하고 있다. 창을 낮게 단 골목을 지나 세 들어 사는 주인집 대문을 열면 화자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화자의 방은 다른 골목으로 창을 내고 있다. 집들이 밀집한 도시의 많은 골목을 경험하였겠지만, 전봇대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전깃줄이 다른 통신선들과 함께 엉켜 있어서 정말 전봇대 밑동을 땅에 묻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2연은 주인집 할머니 얘기다. 옛 사람답게 겨울을 냉방인 채로 견디며, 거기다 가는귀까지 먹었다는 노인에 대한 정보를 준다. 아침저녁 큰 소리로 기도하고 밤새 마른기침을 한다는 정보까지도. 3연에서는 고양이를 등장시켜 읽히지 않는 책을 통해 심란한 화자의 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읽기의 진도가 나가지 않자 책을 머리맡에 던져 놓고 깡마른 안테나처럼 방안에 누워 누군가의 안부를 떠올리다 지우다 한다.

시 '녹번동'에서도 화자는 방에서 혼자 지낸다. 며칠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화자는 방으로 들어온 햇살이 오래전부터 자신의 몸을 기어 다녔고, 집주인은 지네가 나온다며 약을 치고 갔다고 한다. 어쩌면 화자는 시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진술의 구체성을 보여주는 이혜존 시인은 197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다소 긴 제목인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는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는 54편의 시가 실려 있다. 다른 시 '길을 잃다'는 인간의 무지를 지렁이를 통해 비유한다.

1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을 지척에 두고 지렁이는 길을 잃었다
오도 가도 못한다는 불안이 제 무덤을 판다.
지렁이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파고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꿈틀거린다.
바닥에 못을 치다 딱딱하게 구부러진 지렁이들.
지렁이를 피해 걸어가다 넓은 보폭이 미안해지는 길.

(중략)

3

소나기 타닥타닥 제 몸을 바닥에 튕겨낸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잔가지와 함께 뒤엉킨 지렁이들.
구멍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가닥가닥 떠오른다.
- '길을 잃다', 부분

풀밭에서 길거리로 나온 지렁이는 무엇이 불안한지 자꾸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판다.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풀밭으로 가야하는 데 그것을 모른다. 모르니 길을 잃은 것이다. 길거리에 노출 된 것이 불안하여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못하는 지도 모른다. 결국 길거리는 자기가 판 자기 무덤이 되고 만다. 많은 지렁이들이 길거리에서 죽는 이유다. 필사적으로 땅을 파다가 몸에 습기를 잃고 딱딱하게 굳어져 죽는 것이다. 지렁이는 콘크리트 바닥에 기어 나와 잔가지와 함께 뒤엉겨 있다. 살아서는 구멍을 향해 나아갔어야 하는데, 죽어서도 구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시 '경건한 식사'에서 혼자 밥을 먹는 화자의 행위가 엿보인다. "식탁과 티비가 시선을 주고 받네요 밥을 넘기고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나도 가끔씩 조잘거리고, 늦은 저녁을 먹어요 비스듬히 티비를 보고 벽을 보아요 골똘히 얼룩을 바라보면 얼굴과 닮았다는 생각, 모든 얼룩에서 얼굴을 찾아요"라고 한다. 화자는 밥을 먹으며 티비와 벽을 보면서 얼룩에서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낸다.

선적이고 잠언적 문구도 더러 보인다. 시 '역류'에서 "불꽃 위 눈송이가 너울 댄다/ 장작은 젖지 않는다"거나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살아보기 전에 무덤이다"라고 관념으로 정리한다. 시 '관통'에서는 식물의 속성을 통해 인생을 비유한다. "담쟁이 넝쿨이 외벽을 올라탄다 전속력으로 밀려오는 바람에 뒤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펄럭인다 뒤돌아보다 상체가 젖혀진 것들 횡단하던 리듬을 잃는다"고 한다. 찬찬히 시를 들여다보며 시인이 숨겨놓은 비의를 캐내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시집이다.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이해존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131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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