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50년 영도시장…마지막 '이불속 온기'

머니투데이 이보라 기자, 유승목 기자 | 2018.01.18 05:15

폐쇄앞둔 서울 동작 영도시장 가보니, 삶의 터전 추억속으로…"전통시장 몰락 단면"

9일 서울 영도시장의 모습./사진=이보라 기자

대낮이지만 어두웠다. 손님의 발길은 거의 끊긴 듯 했다. 시장 이름이 적힌 간판은 녹이 슬어 알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문에 자물쇠가 걸렸거나 문 앞 판매대는 비닐로 덮여 있다.

1월 둘째 주 평일에 찾은 서울 동작구 영도시장의 모습이다. 길게 뻗은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불빛이 비치는 이불 가게를 만났다. 영도시장이 처음 생겼던 53년 전부터 장사를 한 '희수네 포목'(현 '자미온')이다.

가게에는 주인 고옥진씨(81)와 노인 3명이 흰 이불을 덮은 채 앉아 있었다. 고씨를 만나러 때때로 놀러 오는 손님들이다. 노인들은 기자를 보자 청년을 본 지 오래됐다며 반가워했다. 고씨는 "날이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다. 이불 덮고 같이 앉아 있자"며 자리를 내줬다. 손길은 따뜻했다.

'사장님'이라고 부르자 고씨는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20대부터 '시장 아줌마'로 살았다는 고씨는 "이 시장에서 모두의 아줌마이고 언니였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고씨는 영도시장에서 이불과 베개 등을 팔아 자식과 손자, 손녀까지 길러냈다. 고씨에게 영도시장은 삶의 터전 그 자체였다.

9일 서울 영도시장 '희소네 포목'(현 '자미온')에서 주인 고옥진씨(81, 사진 왼쪽)와 지인들이 본지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이보라 기자

그런 영도시장이 내년이면 사라진다. 2021년 완공될 동작구청 복합행정타운 부지로 편입되면서다. 편입 결정에는 1990~2000년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기존 고객이 떠난 게 영향을 미쳤다.

시장에서 만난 노인들은 영도시장이 20여년 전까지도 사람이 끊이지 않는 활기찬 시장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상점 수가 41개에 불과한 지금과 달리 한창 잘 나갈 땐 200여개가 넘었고 물건도 넘쳤다며 눈을 반짝였다.

고씨는 "개발한다고 한 지가 벌써 20년"이라며 "투자는커녕 개발한다고만 들쑤시니 장사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 지경이 됐다. 매출도 바닥을 만들어놨다"고 말했다.

영도시장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일상이었다. 주민 이문자씨(79)에게 영도시장은 친정 같았다. 이씨는 "사람 간에 정을 나눌 수 있는 전통시장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 살 때부터 영도시장 주변에 살았던 대학생 정유진씨(21)는 초등학생 시절 신발이 필요하면 어머니 손을 잡고 이 시장을 찾았다. 중학생이 되자 시장은 정씨의 통학로가 됐다. 참기름과 생선 비린내가 뒤섞인 듯한 '시장 냄새'가 싫어 코를 막았지만 시장 안 분식집 떡볶이를 무엇보다 좋아했다.

"영도시장에 특별한 추억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허전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시장은 제 일상이었던 거에요." 청년에게도 동네 전통시장의 소멸은 상실감을 안겼다.

9일 서울 영도시장 입구 신발 가게 주인이 손님에게 신발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보라 기자

남은 상인들은 여전히 영도시장에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정씨가 고사리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즐겨 찾았던 신발가게에 들어가봤다. 주인 이모씨(59)는 한 손님이 신발을 가리키며 치수를 묻자 30년 경력자답게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이씨는 "(그 신발은) 235㎜(밀리미터)인데 손님 발은 볼만 넓고 길이는 짧아서 잘 맞을 것"이라고 답했다. 신발을 신어 본 손님은 "신어보니 딱 맞네"라며 바로 값을 물었다.

"동네에 전통시장이 하나씩은 있어야 할 텐데 시장을 이어줄 젊은이들이 없네요." 예순을 바라보는 신발가게 주인은 안타까워했다.

영도시장 폐쇄는 몰락해가는 우리 전통시장의 단면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영도시장이 50년 전과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왔다는 건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러 환경적 영향도 있지만 시장 스스로 진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도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네 시장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이불 속에서 사는 이야기를 하며 이불을 파는 가게. 대형 마트에도 백화점에도 없다. 내년이면 더는 볼 수 없고 상인과 주민의 추억 속에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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