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다가도, 새벽 2~3시에 졸다가도 주민이 부르면 뛰쳐나가야 한다. 혹시나 차를 긁는 날에는 수백만원씩 비용을 물기도 한다. 경비원 B씨는 "동료 경비원은 차 빼달라는 주민에게 키를 놓고 가라고 했다가 안빼줬다고 관리사무실에 불려가 무릎 꿇고 빌고 오기도 했다"며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와서 '아저씨, 차 빼줘요!'하며 버릇없이 굴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파트 일부 주민들의 무리한 요구로 경비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본연의 업무가 아닌 택배 보관, 재활용 쓰레기 정리는 예삿일이고 주차관리나 주민들이 오갈 때 '센스있게 문을 여는 것'까지 경비원 업무로 요구받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경비원들이 휴게 시간을 침해받는 것은 물론, 욕설을 듣는 등 이른바 '갑(甲)질'까지 당한다. 하지만 경비원들은 생계 때문에 이렇다 할 요구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실정이다.
◇車 안빼준다, 잠잔다며 '욕설'… 막을 도리 없어=경비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주민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며 막 대하는 것이다.
강남구 C아파트 경비원 D씨는 동료가 당한 사례를 털어 놓았다. D씨는 "차량을 가지고 나갔다 온 주민이 주차할 자리가 없다며 경비원에게 시비를 걸더니 욕설을 하고 난리를 쳤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가 들려준 녹음 파일에는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주민이 경비원을 향해 "내가 너 때문에 이X끼야. 나가질 못해 이 XX끼야. X놈의 X끼야"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내가 지금 간다. 관리소장한테 XX끼야. 너 사무실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D씨는 "이렇게 욕설을 듣는 것은 예삿일"이라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이를 먹고 이렇게 당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마포구 E아파트 경비원 F씨는 "휴게시간에 잠을 자는데, 술 취한 주민이 '이XX야, 안 지키고 잠만 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털어놨다. 또 양천구 G아파트 경비원 H씨는 "눈길에 미끄러졌다며 경비실에 찾아와 '제대로 청소를 안하느냐. 밥그릇 뺏기고 싶냐'며 으름장을 놓는 주민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머니투데이가 지난 9~10일 취재한 결과 이 같은 법 조항은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경비원 업무로 당연시 됐던 재활용품 분리수거, 택배 보관, 눈·낙엽을 치우는 등 청소 등은 여전했다.
서울 강서구 I아파트 경비원 J씨는 "주민들이 재활용품을 제각각 가지고 나오는 통에 분리수거 업무를 자정 넘을 때까지 하고 있다"며 "법은 법일 뿐이고 현실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 K아파트 경비원 L씨도 "택배 관리 업무도 하고, 최근에는 눈이 많이 와 새벽부터 치우느라 많이 바빴다"며 "경비 업무보다 이런 잡무들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부당 업무 어겨도 '처벌조항' 없어= 문제는 법에 '경비원 업무'의 구체적 항목이 명시돼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어겨도 마땅한 처벌조항이 없다는 것.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하도 갑질이 많아 상징적으로 넣었으면 좋겠다 해서 공동주택관리법을 개정했다"며 "용역계약서를 작성할 때 경비원 업무의 범위에 대해 협의하면 된다"고 말했다.
사실상 을(乙)의 위치에 있는 경비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근덕 노무법인 유앤 대표는 "부당한 업무를 시키면 안된다고 하는 규정을 거의 100% 다 어기고 있다"며 "법 취지와 현실의 격차가 큰데 안한다고 하면 해고되기 때문에 해결책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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