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58년 개띠'] 임백천 "젖은 낙엽정신으로 40년 회색분자 역할"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 2018.01.01 06:11

[릴레이 인터뷰] ① 올해 방송 40주년 맞은 가수 겸 MC 임백천…“중간이지만 중심 잃은 적 없어”

편집자주 | 띠 앞에 연도를 붙이는 간지는 ‘58년 개띠’가 유일하다. 이 상징이 설명하듯 58년 개띠 출생자들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주역으로 회자한다. 90만 명에 이르는 최다 출생자로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세대다. 생존 경쟁이 치열했지만 고교 평준화 입시제도를 통해 평등의식을 배우고, 가장 일할 나이인 30대 후반 외환위기인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겪으며 단합에도 앞장선 이들은 ‘위’로부터 눈치보고 ‘아래’로부터 자극받는 ‘낀 세대’의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18년 60세, 58년 개띠들은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치열한 과거를 딛고 찬란한 현재를 거쳐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는 문화예술계 ‘58년 개띠’ 5명의 인생을 따라가봤다.

1990년대 지금의 유재석처럼 '국민 MC'로 통했던 가수 겸 MC 임백천. 그는 올해 7년째 이어가는 KBS 2라디오 '라디오7080'의 진행을 맡고 있다. 그는 "라디오 단일프로그램으로는 이 프로그램이 최장수"라며 "58년 개띠의 젖은 낙엽정신이 보여준 최고의 모델"이라고 웃었다. /사진=이기범 기자

바가지머리로 나름 멋을 부린 가수 겸 DJ 임백천이 자신이 진행하는 KBS 2라디오 ‘라디오 7080’ 생방송 스튜디오로 인터뷰어를 끌고 들어갔다. “왜 저를 끌고…” 기자가 흠칫 놀라 묻자, “쉿” 하며 “내 머리 어때요?”하고 대뜸 물었다.

“예. 약간 촌스럽기도 하고…” 대답이 어설프게 끝나기 무섭게 프로그램 시작 시그널이 울렸다. “아, 눈이 참 많이 내렸네요. 교통은 좀 불편하겠지만,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보기 좋네요.” 하며 손으로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낮 12시 방송인데도 순식간에 댓글 수십 개가 봇물처럼 붙었다. 그중 상당수는 임백천을 ‘백빈’이라고 불렀다. 무슨 뜻이냐고 하자, “아 그거요? 현빈, 원빈에서 진화한 거지. 나름 자가 발전한 결과랄까.”하며 깔깔 웃었다. 바가지머리는 영화 ‘아저씨’의 원빈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아직 인기는 죽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1990년대 임백천은 지금의 유재석 같았으니. 눈이 수북이 쌓인 지난 12월 18일 만난 그는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입담과 순발력은 물론이고 흠 잡을 데 없는 기타 실력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추며 말로만 듣던 ‘58년 개띠’의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성기보다 입담과 기타 실력이 더 는 것 같습니다.

“그게 ‘58년 개띠’의 특징이죠. 하하. 어떻게든 버티는 것, 저는 그걸 ‘젖은 낙엽정신’이라고 불러요. 우리 세대가 다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약간 살얼음이 묻은 늦가을 낙엽은 쉽게 쓸리지 않잖아요. 악착같이 땅에 붙어서 살아남는 거죠.”

가수 겸 MC 임백천. /사진=이기범 기자

-58년 개띠,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개떼처럼 많아서 그렇게 명명된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베이비붐 세대 중 1958년 출생자가 가장 많잖아요. 그래서 제일 목소리가 큰 세대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론 안 그래요.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냈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우리는 억울하거나 기뻐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소리치지 않거든요. 많이 참는 세대죠. 위로는 선배나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 후배들은 챙겨야 하고, 그렇다고 좋은 세대 소리는 듣지 못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낀’ 세대 역할로 살았어요.”

덕수초등학교 시절, 임백천은 1600여 명 개띠 동기들과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는 “한 반에 70명씩 2부제 수업을 했다”며 “학생이 너무 많다 보니 수업 빼먹고 영화 보러 다녀도 선생님께 들키지 않았다”고 했다. ‘땡땡이’의 명수였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을 듣고 가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5.16 군사정변을 맞고 고등학교 입시 땐 소위 ‘뺑뺑이’(고교 평준화)로 제도가 바뀌면서 격동의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쉽지 않았겠습니다.

“살아남기가 아니라 살아내기였어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전쟁 세대라 생활을 생존의 개념으로 이해했고, 우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죠. 어릴 땐 친구들이 너무 많아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친구들끼리의 관계는 돈독했어요. 그게 58년 개띠들의 장점이자 특징이에요. 그땐 사는 형편이 다 비슷해서 아버지가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자영업자이든 전혀 상관없었어요. ‘너희 아파트 몇 평이냐’ 같은 얘기는 아예 없었고, 친구가 마음에 들어 대화가 통하면 그때부턴 부모가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사회에 나와서 박지만(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씨와 알게 된 후 ‘뺑뺑이’ 관련 소문에 대해 물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만씨는 약자한테 약하고 강자한테 강한 스타일의 속 정 깊은 남자로 기억해요. 우리 때 갑자기 입시제도가 바뀌어서 당시 대통령 아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많았거든요. 사회에 나와서 슬쩍 물어보니, ‘자기도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더라고요.”

올해 환갑을 맞은 '58년 개띠' 임백천은 라디오 진행에서도 입담, 순발력, 기타 연주 등 전성기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매일 낮 12시 청취자와 만나고 있다. /사진=이기범 기자

-치열한 경쟁 세대지만, ‘특혜 세대’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주류로 쉽게 각인되곤 하니까요.

“제가 되게 무미건조한 사람이에요. 우리 세대는 군사정변부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매번 겪었잖아요. 그래서인지 ‘나’라는 것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자기를 앞세우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스타일들이 아니었어요. 그럴 시간도 없었고 상황도 아니었죠. 지금처럼 자기 홍보를 하면 되레 눈총받던 시대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베이비붐 세대들이 대개 그렇지만 인내하고 나를 고집하지 않는 스타일을 공통점으로 갖고 있어요.”

-지금 자기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세대를 보면 어떤가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한국만큼 명석하고 발 빠른 민족이 있나요? 일등 국가가 될 거라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예요. 다만 조금 더 참아주면 좋겠어요. 지금 동서남북, 세대, 남녀로 갈라져 모두 자기 목소리만 내는 데 열을 올리고 있잖아요. 태생적으로 자기표현 잘 안 하는 세대들이 보기엔 안타깝죠. 무엇보다 온라인에서 싸움 붙이고 빠지는 무책임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잖아요. 자기 생업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인데 정치·경제·사회 모든 일에 일일이 참여하고 결정하려 드니 합일점을 찾을 수 없다고 봐요. 58년 개띠에 대해 때론 소리 내지 않는 회색분자라는 얘기도 하는데, 미국에서도 보수와 진보 중간지대를 존경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죠. 중간이라고 해서 생각의 중심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국민 MC라는 인지도와 ‘특유의 중간성’으로 정치권에서 러브콜도 받았는데요.

“한번은 여당중진의원으로부터 비례대표를, 또 한번은 야당중진의원으로부터 지역구를 제안받았죠. 국회의원은 법 만들고, 예산 심의하고 행정부 감사하는 중요한 사람 아닌가요?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하죠. 저는 누가 돈 주고 청탁하면 받을 사람이에요. 그런 것에 쉽게 넘어갈 것 같거든요.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식구 건사하는데도 쩔쩔맨다’고 했더니, ‘그럼 와이프라도…’하길래 웃고 말았죠.”

가수 겸 MC 임백천. /사진=이기범 기자
임백천은 대학 1년 때인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 입상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수상을 계기로 각종 프로그램의 MC를 도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대학 2년 때 ‘젊음의 행진’ 전신인 MBC ‘젊음이 있는 곳에’의 진행을 맡아 국내 최초 TV MC로 기록됐다. 튀지 않고 신뢰성 있는 진행에 각 방송사가 앞다퉈 섭외했고, 이 중 한 방송사는 ‘특채’를 제안하기도 했다. 쉽게 내민 방송사의 손을 그는 쉽게 잡지 않았다. 인기가 치솟을 때, 그는 방송의 불안한 미래로 고민하다 결국 전공인 건축을 살려 공영토건 건축기사로 현장을 5년간 누볐다.

-그러다 30세쯤 다시 방송으로 복귀했죠.

“다시 돌아왔을 땐 아무도 절 기억해주지 않았어요. 운 좋게 어떤 프로를 맡았는데, 6개월 만에 막을 내렸죠. 그러다 노영심이 작곡한 ‘마음에 쓰는 편지’라는 곡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방송에 정착하기 시작했어요.”

-어렵게 시작한 방송을 오랫동안 잘 ‘버틴’ 원동력도 ‘58년 개띠’에서 찾을 수 있나요.

“하하하. 그랬어요. 회색분자 같은 그 이미지를 잘 활용했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절대 치우치지 않는 방송을 제1원칙으로 삼았죠. 세대가 함께 보는 프로그램이 가장 큰 목표였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특정 세대에 고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였어요. 또 MC는 스타가 아닌 스태프이어야 한다는 사실도 지켰죠. 나대지 않고 최대한 몸을 낮춰 게스트를 띄우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거든요.”

1992년 MBC ‘특종 TV연예’의 진행을 맡을 때 서태지를 방송 최초로 소개한 이도 임백천이었다. 당시 주류 음악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인 가수 앞에서 그는 어떤 비판도 칭찬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신인가수가 위축되지 않도록 따뜻한 격려를 보낼 뿐이었다. 이 태도로 그는 서태지가 음반을 낼 때마다 ‘지명 MC’로 불려 나갔다. 임백천은 “당시 PD 등 제작 스태프를 지명하는 톱스타가 딱 2명이었는데, 나훈아와 서태지가 그 주인공”이라며 “나는 운 좋게 늘 서태지의 부름을 받았다”고 웃었다.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 예쁘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 나서며 환갑을 맞이한 임백천. 그는 "40년간 방송 활동을 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스타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며 "신체조건도 재능도 별로 없는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이기범 기자

-올해 방송 활동 40주년을 맞습니다.

“TV는 쉬었다 하기도 하고, 라디오는 쉬지 않고 오래 했어요. ‘라디오 7080’은 단일프로그램은 가장 길어요. 내년이 7주년이니까. 제가 가진 재주나 실력에 비해 오래 버틴 셈이죠. 운 좋게 버텼기 때문에 늘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 될 수 있다’고요. 제가 여기서 잘하지 못하면 가족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위기감으로 매일 젖은 낙엽 정신을 발휘하죠.”

임백천은 40주년 기념으로 TV에 오랜만에 출연한다. 이를 위해 지드래곤이 사용한 옷과 모자로 단장해 원빈 머리처럼 ‘신상’ 스타일로 시청자와 만날 계획이다. “환갑에 평소 안 하던 짓 좀 하려고…” 드러내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 ‘58년 개띠’의 일탈이 시작된 걸까. 격변 속에 살아온 카멜레온 세대의 발걸음은 좀처럼 멈추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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