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왜 안 나왔지…' 화포 최무선의 무기혁명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7.11.18 06:51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70 – 최무선 : 화약과 신무기로 왜적을 막다


고려 말의 과학자이자 무장이었던 최무선은 알고 보면 사극의 주인공 요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그동안 TV에서 자주 접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이즈음에 한번 짚어볼 만하다. 당시 그가 일으킨 무기혁명은 우리나라에 화력전의 새 패러다임을 열었다. 문헌기록은 적지만 드라마가 있고, 역사의 여백이 많아 판타지를 자극한다.

“왜구를 물리치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태조실록에 나오는 최무선의 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는 전우 사이였다. 고려 말에 함께 왜구를 격퇴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성계가 활솜씨를 뽐냈다면, 최무선은 화약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어째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화약만한 것이 없다고 했을까?

14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입에 큰 고통을 겪었다. 북쪽으로는 홍건적과 여진족이 쳐들어왔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다. 특히 왜구는 동남 해안을 약탈하는 것도 모자라 서해를 돌아 수도 개경까지 압박했다. 오죽하면 고려 우왕이 도읍을 내륙으로 옮기려 했을까. 실제로 1377년 철원에 사람을 보내 궁궐터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은 남북조의 혼란기에 빠져 있었다. 중앙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기존의 해적은 물론 지방 세력까지 대거 왜구에 가담했다. 그들의 군사력은 막강했고, 노략질은 거세졌다. 육지에서야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막아냈지만 바다에서는 속수무책! 세금 수송하는 조운선이 털리고 백성들이 잡혀 끌려가는데 고려 수군은 뒷북치기 일쑤였다.

최무선은 궁리했다. 그는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었다. 광흥창은 조운선이 곡식을 싣고 오면 일단 저장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한 곳이다. 아무래도 왜구의 노략질에 민감한 집안 분위기였을 터. 최무선은 당시 불꽃놀이에나 쓰던 화약을 주목했다. 화약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면 재빨리 노략질하고 도망가는 왜선들도 박살낼 수 있지 않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화약을 수입해 쓰고 있었다. 이때가 원명교체기인데 멸망하는 원나라도, 일어서는 명나라도 고려가 화약을 무기화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국산화해야 하는데 문제는 화약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최무선은 중국 상인들에게 화약제조법을 묻기로 했다. 화약이 발달한 강남지역 상인들이 표적이었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일 동안 물었다.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에 건의해 시험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최무선더러 ‘속이는 자’라고 험담하기도 했다.”(태조실록)

최무선이 화약 국산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사기꾼’이라는 험담까지 들었다. 유망한 벤처기술을 갖고 있으면 뭐하는가. 인정을 못 받는데….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묻고 실험을 거듭했다. 원나라 기술자 이원에게 핵심기술인 염초까지 터득하며, 마침내 화약 국산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렇게 되자 국정을 의논하는 도당(都堂)에서도 최무선을 밀어주기로 했다. 여러 해 동안 그의 건의를 무시했지만, 완성된 화약을 들고 나타나 그 위력을 보여주는데 어쩌겠나. 1377년 비로소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국산 화약을 이용해 화포를 제작하는 관서였다. 책임자가 된 최무선은 여기서 대장군포, 화전, 주화 등 수많은 신무기를 개발해냈다.

대장군포(大將軍砲)는 대포, 화전(火箭)은 로켓 불화살이다. 주화(走火)는 폭발물을 장착한 비행체로 오늘날의 미사일이라고 보면 된다. 신무기를 참관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무선은 나아가 함포사격을 할 수 있는 전함 제도를 연구해 도당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가 구상한 해상 화력전은 얼마지 않아 실전에서 빛을 발한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뭍에 올랐다. 각 주군(州郡)으로 흩어져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운반하다가 땅에 쏟은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고려사절요)

1380년 왜구들이 500척의 대규모 선단을 꾸려 고려에 침입했다. 그들이 진포, 지금의 군산에 상륙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화포를 시험케 했다. 진포에 이른 고려 수군은 왜구 선단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다.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로켓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자, 왜선은 몽땅 불탔으며 왜구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해상 화력전이었다. 세계 해전사에서는 흔히 레판토해전(1571)의 스페인 함대를 그 효시로 보지만, 실제로는 최무선과 고려 수군이 200년 앞서 실현했고 큰 승리를 거뒀다. 배를 다 잃고 육지에 묶인 왜구 잔당은 이성계가 섬멸했다. 그 후 왜구들의 노략질은 사그라졌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생업에 복귀했다.

최무선이 끈질긴 벤처정신으로 이룩한 화약의 국산화와 신무기 화포! 그것은 무기혁명이었고, 화력전의 새 패러다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맹위를 떨친 이순신 장군의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권율 장군의 신기전과 비격진천뢰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무선이 있다. 믿어지는가. 수백 년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다. 창칼과 화살뿐 아니라 나름의 첨단무기로 나라를 지켰다.

옛날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를 합친 글자다. 역사적으로 큰 활을 잘 쓴 사람들답게 한민족은 쏘는 무기에 능한 듯싶다. 하지만 무기는 마구잡이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때 그 가치가 훨씬 커진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최무선이 방비한 것처럼 평화를 위한 힘센 뒷받침으로 풀어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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