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목(同想異目)] 재벌·김상조에 필요한 '시간'

머니투데이 이진우 더벨 부국장 겸 산업부장 | 2017.11.08 04:22
“기업들의 자발적인 개혁의지에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기업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도록 세밀한 전략을 좀 더 속도감 있게 진행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린다. 너무 불안해하지는 마시라. 준법경영과 상생협력을 실천하면 걱정하실 일이 없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지각하는 빌미를 제공한 5대그룹 경영진과의 정책간담회는 그의 말처럼 무작정 ‘재벌들 혼내는 자리’는 아니었다. 당시 현장에 나갔던 후배들의 취재메모를 보니 참석한 사장들의 표정도 제각각이다. 맨 끝자리에 앉은 황각규 롯데지주 사장은 김 위원장의 말을 별도로 준비한 메모지에 깨알같이 받아 적으며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훈 삼성전자 사장은 별도 메모 없이 정면을 응시하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은 모두발언 자료의 빈 공간에 빠르게 메모하며 생각을 가다듬는 듯 보였다. 반면 하현회 LG 사장과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경청했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각각의 그룹이 처한 현실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김 위원장의 모두발언은 어차피 자료로 나눠준 것이라 굳이 받아적을 필요가 없는데도 열심히 메모한 걸 보니 역시나 어려운 자리였나 보다. 보는 사람이 많은 공개석상에서 ‘경제 검찰’ 수장의 ‘말씀’을 멀뚱멀뚱 듣기만 하는 게 좀 민망했던 모양이다. 김 위원장이 굳이 ‘혼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지배구조, 공익재단, 사익편취, 경영권 승계, 하도급거래 등 등장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문제들이다. 오너들과 엮여 있는 이슈들은 특히나 예민하다.

김 위원장의 말대로 준법경영과 상생협력을 실천하면 굳이 걱정할 필요도 긴장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재벌들이 줄줄이 불법을 저지르고 상생협력을 외면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잣대’에 대한 ‘신뢰’다. 재벌개혁과 경제적 약자 보호라는 정책의 큰 줄기 속에 재계는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정위 수장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과 잣대에 걸려들지 않는, 다치지 않는 대책을 강구하며 살 길을 모색했다.


요즈음 재벌 또는 대기업 관련 기사에 따라붙는 인터넷 댓글은 저주에 가깝다. 공정위 이슈와 엮여 있으면 “재벌들이 공정한 거래를 해본 적 있나” “공정거래 하면 다 망할 집단들” “갑질에 각종 비리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식이다. 상황이 이러니 어디 대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다. 과거 용인 내지는 권장까지 한 정책을 따라갔다가 하루아침에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섣불리 얘기했다간, 무작정 버티고 있다간 혼날 수밖에 없으니 잔뜩 긴장하고 분위기만 살피는 형국이다. ‘혼내는 공정위원장’과 열심히 메모하면서 ‘혼나는 재벌’의 모습이 그리 억지스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구설에 오른 “혼내고 왔다”는 김 위원장의 지각의 변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리 틀린 얘기가 아니다.

이날 경영자들은 “변화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김 위원장은 “(시간을) 너무 많이 주기는 어렵고 일단 의지라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별도로 국민들에게 “공정위에도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칼춤 추듯 접근하는 기업개혁은 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한민국 재계와 공정위 수장이 직면한 어렵고 씁쓸한 현실이 녹아들어 있는 ‘시간 요청’이다. 재벌과 김상조, 국민들이 주고받는 이 ‘시간’이 정책의 실효보다 상호간 의구심과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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