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사나이’ 존 웨인은 없다

머니투데이 뉴욕(미국)=송정렬 특파원 | 2017.10.18 03:27

[송정렬의 Echo]

어린 시절 유난히도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시절 토요일은 오전에 학교를 마치고 신 나게 놀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토요일을 기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밤이 되면 돈 한 푼 내지 않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주옥같은 명화를 즐길 수 있는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주말 안방극장에서 가장 많이 방영하고 인기 있었던 장르는 단연 서부영화였다. ‘역마차’, ‘기병대’ 등 무수한 서부영화의 주인공을 도맡은 이가 서부영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존 웨인이었다. 항상 기병대 유니폼인 캐벌리셔츠를 입고, 목엔 스카프를 두른 존 웨인은 손에 총 한 자루만 들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악당들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였다.

지난 1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59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했다. 범인은 평범하고 여유로운 은퇴자였다. 그 범행동기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언제 어디서든 희대의 대학살범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가 미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 정도 사건이 발생하면 당연히 총기규제의 목소리가 미국 전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미국인들의 반응은 우리의 상식과 사뭇 다르다. 총기규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뉴욕타임스 등 진보적 언론이나 심지어 야당인 민주당조차도 그 실현 가능성엔 고개를 흔든다.

왜일까. 우선 막강한 로비력과 430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전미총기협회(NRA)가 버티고 있다. 또 NRA의 막대한 후원금과 표는 총기 규제를 강력히 반대하는 대통령과 공화당 주요 의원들에게 몰린다.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은 사실 따로 있다. ‘총기소유=자유’라는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믿음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총기소유자의 74%는 총기소유를 자유의 핵심이라고 답했다. 심지어 “이번 사건은 자유에 대한 비극적인 비용”이라며 총기규제를 반대한 라스베이거스사건의 생존자 2명의 말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다.


서부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도 목숨을 걸고 새로운 땅을 찾아 마차를 타고 서부로 향하고, 드넓은 농장을 나 홀로 지켜야 했던 미국인들의 삶은 역사적 실재였다. 때문에 미국인들에 총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포기할 수 없는 권리였다. ‘민병대는 국가의 안전에 필요하므로 미국시민은 무기를 소유할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수정헌법 2조의 뿌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까마득한 200여 년 전 건국시대나 개척시대부터 내려온 전통과 관습이 오늘날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미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사건까지 477일간 총 521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최소 4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 입은 사건만을 집계한 결과다. 미국 언론이 표현하는 대학살이 일상화되고 있는 셈이다. 악당을 통쾌하게 쓰러뜨리고 선량한 사람들을 구해줄 서부사나이 존 웨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방비상태의 불특정 다수나 심지어 5~10세의 어린 초등학생들마저 이유 없는 대학살의 먹잇감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방어를 위한 총기소유 주장은 자가당착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 더 이상 개척할 새로운 땅도 없고, 시골농장이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에게 총기소유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 이웃을 위협하는 명백한 실재적 위협일 뿐이다. ‘이게 미국이다’(This is America)라는 말로 뭉개기엔 그 공포와 고통이 위험수위를 한참 넘어섰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로부터 무엇인가 배웠기를 바란다.” 존 웨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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