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음반은 이 밴드가 지금껏 내놓은 작품 중 가장 재미있고 활달할 뿐만 아니라, 이십센치로 늘려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색감이 풍부하다.
그러니까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어쩔 수 없이 독집처럼 꾸민 ‘그의 방’엔 찌질함과 해학, 장난스러운 리듬들이 짬뽕처럼 수놓여 십센치 표 음악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기타 빠진 보컬이 해야 할 역할을 통해 보여주는 창법의 미학도 새로 느낄 수 있다.
“십센치라는 정체성이 보여주는 결을 따라 작업했을 뿐이에요. 저는 콘셉트나 키워드를 잡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물 흘러가는 대로 넣고 싶은 곡을 마구 추려 넣었어요.”
2004년 홍대 인디 신에 들어올 때부터 십센치는 주류 뮤지션이 걸어온 길과 정반대로 향했다. 가사는 농염하다 못해 저질스러웠고, 사랑에 허기진 남자의 비굴한 읍소(?) 같은 흐느낌은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모두 ‘예쁜’ 목소리에 심취할 때, 권정열은 ‘섹시’한 목소리로 승부했다.
십센치가 보여준 B급의 강한 메시지는 금세 대중의 일상에 파고들어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때론 ‘쓰담쓰담’하기도 하고, 때론 스타킹 아닌 ‘킹스타’로 둔갑해 사랑을 속삭였다.
3년 만에 내놓은 4집도 이런 수순을 제대로 밟는다. 아니, 찌질의 완성판이라고 불릴 극단의 노래까지 선보인다. ‘하루 종일 그대가 집에 오기만/무릎 꿇고 얌전히 기다렸다가/초인종이 울리면 문 앞에 앉아/반갑다 꼬리를 흔들거야/~’(‘펫’ 중에서)
남자의 찌질함은 이제 강아지로 비유돼 “24시간 구속해달라”고 외친다. 권정열은 “이 노래 듣고 혐오하는 사람 없는 걸 보니 뿌듯하다”며 “그래도 전보다 더러운 건 많이 없어졌다”고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단독공연이라며 전화로 들려주는 ‘폰서트’, 전 재산을 털어 너를 위해 준비한 ‘호텔 룸’ 등 무릎을 치는 응용력으로 찌질의 잔잔한 재미를 선사하는 곡들에선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인 ‘나’의 주체의식은 거세됐다.
“결혼 전 겪은 일들이 강하게 각인된 까닭인지 늘 비슷한 얘기들이 나와요. 제가 봐도 주인공은 너무 불쌍할 정도로 찌질하고 연애에서 자존감도 낮죠. 숨겨진 저의 솔직한 태도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가 만들어낸 자아인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주류에서 흔히 쓰는 ‘내가 널 위해 뭘 해줄게’ 같은 가사에 공감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에요.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행동한 곡이 ‘쓰담쓰담’이었으니까요.”
가사는 찌질해도, 곡은 입에 달라붙을 정도로 감칠맛 넘친다. ‘pet’ ‘폰서트’ ‘호텔룸’ ‘아일랜드’로 이어지는 흥겨운 곡들은 기존 십센치의 4분의 4박자보다 더 그루브(groove·리듬감)하고, 쉬운 코드로 편곡의 재미를 높이는 리듬의 변주는 미카(mika)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모인 곡들은 고급 브랜드의 형식을 좇지 않고 편의점의 질감 있는 내용물을 추구하죠. 흔히 ‘누구의 실수’라고 하잖아요. ‘외국 유명 감자 칩보다 편의점의 그것이 더 맛있어’하는 그런 느낌이 십센치가 추구하는 방향인 셈이에요.”
첫 곡 ‘에브리씽’(Everything)부터 ‘별자리’ ‘일시정지’ 같은 느린 곡에서 그의 창법은 더 빛난다. 마치 ‘발라드를 이렇게 간드러지게 부를 수 있나’를 시험하는 듯하다. 트로트 가수의 자연스러운 꺾기에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적 표현이 묘하게 어우러져 듣는 이를 내내 집중시키는 마력이 숨어있다.
그는 “나에 대한 가창력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면서 “중요한 건 보컬로서의 자존감보다 싱어송라이터의 자질”이라고 했다.
4집에서 쉽게 무너지는 뮤지션들을 숱하게 보면서 그의 곡 쓰는 자질이 상대적으로 화수분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주요 멤버가 탈퇴해도, 컴퓨터 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 디지털 음악의 소외자라도 가슴이 잉태한 선율은 깊고 강하니까. 십센치는 죽지도 도태되지도 않았다. 다만, 홀로 남겨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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