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적폐청산과 정치보복

머니투데이 김익태 사회부장 | 2017.10.10 07:31
20세기 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오스트리아 철학자 칼 포퍼는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닫힌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닫힌 사회’에서 개인은 구속과 위압의 대상일 뿐이다. 국가가 시민 생활 전체를 규제하는 탓에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된다. 이와 대립 되는 ‘열린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돼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1945년에 출간된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겪은 나치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비판에서 비롯됐다. 포퍼는 ‘열린 사회’의 적들 중 하나로 전체주의를 지목했다. 실제 나치와 히틀러는 국익이 사익에 우선함을 국민에게 끊임없이 세뇌 시켰고, 이들을 단일한 사상 속에 가두려 했다. 이른바 ‘국가주의’다. 국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국익과 국가의 안위를 제일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확신한다. 그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정당하지 않은 방법까지 사용해도 된다고 믿는다.

영화 ‘변호인’ 속 고문 경찰 차동영은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와 “피의자가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따지자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판단한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증인이 생각하는 국가란 뭐냐”는 물음에는 “그것도 모르느냐”며 변호인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차동영과 같은 국가주의자들에겐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내는 이들은 국가의 적이다. 고립시키고 말살해야 할 존재다. 탄핵 정국 아스팔트에서 터져 나온 ‘빨갱이는 죽여도 돼’는 국가주의의 극단적 형태였다.

이명박정부 때 진행된 국가정보원의 엄습한 정치공작 의혹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민간인 댓글 부대 운영, 공영방송 장악 시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집행…도대체 그 실태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은 물론 기무사령부까지 동원된 증거와 정황까지 나오고 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국정원과 군 요원들이 언론 시민단체 모니터 활동가들이나 할 법한 일을 저질렀다니.

집요하고도 치졸했다. 특정 언론·문화계 인사들의 ‘밥줄’을 끊으려 했고, 나아가 평판을 망가뜨려 아예 재기초자 못하게 만들려 했다. 이들이 저지른 온갖 불법과 비윤리적인 폭력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잠 안 재우고 때리는 것만 고문일까. 블랙리스트는 새로운 형태의 고문이다. 국가기관의 탈을 쓴 열린 사회의 적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침묵을 지키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 경제가 어려워 살기 힘든 시기에 전전 정부를 둘러싸고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퇴행적 시도는 국익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 성공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익은 뭘까. 대다수 국민이 생각하는 국익과 다른 것일까. 혹 ‘국가를 이용한 이익’은 아닐까. 민주공화국에선 국가가 곧 국민이다, 국익은 곧 국민의 이익이다.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란 말에선 ‘전망’보다 ‘바람’이 엿보인다. “퇴행적 시도”라는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 국정원의 파렴치한 행위가 재발 되지 못하게 철저하게 수사하고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게 역사의 발전이다.

이 전 대통령의 말은 결국 ‘정치 보복’하지 말란 얘기다. ‘적폐청산’과 ‘정치보복’. 종이 한 장 차이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뜯어고치면 청산이요, 법적인 문제가 없는데 만들어 뒤집어씌우면 보복이다.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고 해서 심각한 범죄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보복 논리는 궁색하다.

청산과 보복의 프레임에 갇혀 이전투구를 벌이면 본질은 사라지고 정치 공방만 남게 된다. 국정원의 국기 문란은 정치 공방의 대상이 아니다. 단죄해야 할 범죄다. 이 전 대통령은 프레임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설 게 아니라 의혹을 풀 수 있게 진솔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 분열을 유도할 게 아니라 수사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마무리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걱정하는 것처럼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 경제가 어려워 살기 힘든 시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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