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항소하쇼"…대통령을 배신한 대법원장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17.09.29 05:01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자신을 임명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사법부 독립' 지켜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김명수 대법원장은?

"요즘 헌법 잘 계시나? 왜 대법원에 헌법 한분 계시지 않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법무부 장관에게 물었다는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이 '헌법'이라고 비꼬듯 부른 이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다. 불편한 심기가 묻어나는 말투다. 김 전 대법원장이 헌법이 보장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이 전 대통령에게 맞선 때문이다.

시작은 친일파 청산 문제였다. 이 전 대통령은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이었다. 그는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고치려고 했다. 친일파에 대한 공소시효를 단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김 전 대법원장이 반대했다. 결국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조직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그러자 김 전 대법원장은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번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불법행위에 대해 사법기관에 판단을 요구해 온다면 법에 비춰 추호도 용서없이 판단하겠다."

이후에도 김 전 대법원장은 걸핏하면 이 전 대통령과 부딪혔다. 국회 프락치 사건, 윤재구 의원 횡령 사건 재판 등을 놓고 그랬다. 결국 1956년 이 전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통해 사법부를 정면 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 김 전 대법원장은 가볍게 받아쳤다.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 맞선 김 전 대법원장은 오늘날 '사법부 독립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법원은 대법정 입구에 그의 흉상을 놓아두고 있다.

미국에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이 전 대통령과 비슷한 이유로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이 임명한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 때문이었다. 워런 연방대법원장은 인종 문제, 경찰 등 공권력 문제 등을 놓고 대통령의 뜻과 반대되는 판결을 내렸다. 학교에서의 백인과 흑인 간 분리한 것을 금지시키고 경찰의 '미란다 원칙'을 확립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1954년 흑인 학생의 백인 학교 진학을 허용한 이른바 '브라운 판결'은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던 보수적 백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아이젠하워는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아선 주 방위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연방 군대까지 투입해야 했다. 그가 '보수'라는 것만 믿고 임명한 아이젠하워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그를 연방대법원장에 기용한 게 내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통령과 대법원의 갈등은 늘 있어왔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입법부 뿐 아니라 사법부도 행정부의 독주를 막는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그게 삼권분립이다. 오죽하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관 9명을 두고 "아홉명의 늙은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까지 했을까.

그렇게 보면 이승만 정권 이후 우리나라에선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충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채롭다. 모든 대통령과 대법원장들의 생각이 똑같진 않았을텐데. 역대 대통령들이 그만큼 사법부의 독립성을 존중해줬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법부가 알아서 대통령의 의중을 살폈기 때문일까?

김명수 대법원장의 지명은 여러모로 파격이었다. 비(非) 대법관 출신이 대법원장이 된 건 56년만에 처음이다. 50대 대법원장이 탄생한 건 24년만이다. 사법연수원 기수도 전임자보다 13기수나 낮다. 판사 출신인 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밀어준 덕분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김 대법원장은 이른바 '진보법관'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장을 지냈고, 김 비서관은 이 모임의 간사였다.

만에 하나라도 대법원장이 청와대 비서관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재판 독립성'이란 헌법 가치는 훼손된다. 134명의 국회의원이 김 대법원장에게 반대표를 던진 데엔 이런 우려가 깔려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26일 취임 일성으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의 약속이 지켜질 거라 믿는다.

베스트 클릭

  1. 1 쓰레기탑 쌓고 칭칭…'수거 거부' 당한 종량제 봉투, 이런 메모 붙었다
  2. 2 "번개탄 검색"…'선우은숙과 이혼' 유영재, 정신병원 긴급 입원
  3. 3 유영재 정신병원 입원에 선우은숙 '황당'…"법적 절차 그대로 진행"
  4. 4 법원장을 변호사로…조형기, 사체유기에도 '집행유예 감형' 비결
  5. 5 "60대 맞아?" 아르헨티나 미인대회 1위 나이 화제…직업도 화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