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달시인, 조곤조곤 한 생(生)을 들려주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7.09.02 08:24

<116> 권대웅 시인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아무도 없는 산길을 느릿느릿 혼자 걸어 내려오는 사내가 있다. 사내의 머리 위로 바람에 쓸려가듯 머무는 구름과 있는 듯 없는 듯 낮달이 떠 있다. 사내는 길가에서 만나는 나무와 꽃들에게 눈길과 손길을 주고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무언가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여름 끝자락에 노을이 져도 서두르는 기색 없는 사내의 마음은 고요하고도 환하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권대웅(1962~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를 읽으면서 든 느낌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있는 것들”(이하 ‘지금은 지나가는 중’)임을 아는 시인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비도, 불도, 마음도 심지어 만남까지도 지나가는 중이다. 지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유일한 곳은 “모두가 온 곳”, 즉 탄생과 죽임이 머문 오직 그곳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태어나고 사랑하다”는 것. 하여 시인은 분노하거나 노여워하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조곤조곤’ 한 생을 들려준다.

목련이 핀다
꽃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정박해 있던 배가 하늘로 떠난다
깊고 깊은 저 먼
꽃의 바다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하는 북해에
백발(白髮)의 노모가 혼자 저녁을 짓는다

들창 너머 목련나무로 배가 들어온다
겨우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말이 터진다.

나무에 수없이 내리는 닻
저 구름 너머에서 들어오는 배와
통음(通音)하던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운다

떠나는 곳이 있고 돌아오는 곳이 있지만
이 세상에 항구는 단 하나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봄 항구에 꽃이 핀다
- ‘북항(北港)’ 전문

‘북항(北港)’은 14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을 대표할 만큼 빼어난 시다. 노모의 죽음을 목련에 비유한 이 시에서 목련나무는 항구, 꽃은 배가 된다. “목련이 핀다”는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꽃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는 2행부터 탄력을 얻는다. 목련이 필 무렵 돌아가신 노모는 북망산이 아닌 “오도 가도 못하는 북해”에 가서 “혼자 저녁”을 지으며 가족, 즉 자식이 오기를 기다린다. 노모를 그리워하던 시인은 “겨우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북항에서 온 하얀 눈송이들은 노모의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다. “통음(通音)하던 하얀 눈송이들” 덕분에 말이 터지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함박눈처럼 “펑펑” 운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떠나는 곳”이 있고, 그곳에서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목련이 핀다”는 평범한 문장은 우리네 삶이 특별하지 않다는, “꽃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들창 너머 목련나무로 배가 들어온다”와 같은 상상력의 문장은 개인의 삶은 특별하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와락 생각 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 불현듯, 화들짝,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 ‘당신과 살던 집’ 전문

시 ‘북항(北港)’이 노모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시 ‘당신과 살던 집’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나팔꽃’)에서 태어난 시인은 순간순간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갈 수 없는 당신 집 와락 생각 날 때”면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위안을 삼는다. 살아가면서 “순간, 불현듯, 화들짝,”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것은 살아생전 “사랑한다 그 한마디”(‘벽화 2’)를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여 시인은 “사랑하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연금술사 2’), “정처 없이 가난했던 사랑은/ 따뜻한 날이 와도 늘 시리고 춥다”(‘2월의 방’), “메아리조차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장마 1’),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달 속에서 피어난다”(‘나무와 사랑했어’)라고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

달시를 쓰고 달그림을 그리는 시인은 ‘달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시집에도 표제시 ‘달소’를 비롯해 ‘프라하의 달’, ‘동피랑의 달’, ‘서피랑의 달’이 실려 있다. 시인은 목련, 모과꽃, 철쭉꽃, 모란, 동백꽃, 라일락, 싸리꽃, 백일홍, 옥잠화, 해바라기, 나팔꽃, 연꽃 등 많은 꽃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꽃들은 그리움을 더 깊게 해준다. 시인은 “홀연 엄습하는 생의 낯섦을 견디며”(‘생의 정면(正面)’)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착불(着拂)’)를 구름과 노을에 묻고 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권대웅 지음. 문학동네 펴냄. 104쪽/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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