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나이 먹으면 쉼표처럼 포옹을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 2017.08.26 08:45

<115> 나호열 시인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마을버스는 이 마을 저 골목을 들르며 다닌다. 고속버스나 수도권 광역버스, 아니면 시내버스처럼 빠르게 가는 법이 없다. 직선이 아니고 곡선으로 다닌다. 마을버스에 탄 육십 중반에 이른 시인은 지금 종점을 향해 가고 있다. 마을버스는 노선의 종점을 향해 화자는 인생의 종점을 향해 같이 가고 있다. 마을버스에 인생을 은유하고 있다.

시인은 종점에 가까워지는 마을버스 안에서 자신도 종점을 향해가는 마을버스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것이다. 종점에 가까이 갈수록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더 많고, 나이가 들어가는 시인의 주변도 사람이나 욕망이 하나둘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빈 배가 빈 배를 싣고 가는 형국이다. 그러나 화자는 얼마 남지 않은 종점,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시간이지만 꿈을 좀 꾸어야겠다고 한다. 그것도 비현실적인 꿈을.

나호열 시인은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촉도’ ‘눈물이 시킨 일’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내었다. 시인의 고향은 한산 모시로 유명한 고장이다. 애향 시인의 시에도 여지없이 아름다운 ‘모시 한 필’이라는 시가 있다. “모시 한 필 속에는/ 서해 바다를 들고 나는 바람이/ 금강을 타고 오르는 여름이 있다// (중략) // 모시 한 필 속에는/ 서천의 나지막한/ 순한 하늘이 숨어 있고/ 우리네 어머니의 감춰진 눈물과 땀방울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고 특산물인 모시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모시를 만들어 내던 어머니의 숨어있는 고통을 상찬한다.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서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 ‘땅에게 바침’ 전문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청소년이 그랬지만, 고향을 떠나 먼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출세, 즉 세상에 높이 올라보려는 욕망을 꿈꾸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녹아 추락한다는 서양의 전설 이카루스처럼. 출세를 꿈꾸던 시인이 좌절하였을 때 쓰러지지 않게 배경이 되어 준 것은 고향의 땅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인생의 종점에 가까워져서야 겸손해져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날개란 원래 없다는 인식에 이른다. 이런 인식은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실제 세상에서 쓰러지는 경험을 통해 터득하는 것이다. 시 ‘물든다는 말’과 ‘시월’은 어쩌면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시인에게 주는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뜨겁게/ 땀 흘리며/ 여름을 지나온 사람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서로서로 훈장 대신/ 빛나는 쉼표를 나눠주고 싶다/ 저,/ 깊이 휘인 포옹”. 이 절창은 여름을 잘 지내고 아름답게 물든 가을의 인생을 상찬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의 외양도 등이 굽어 “깊이 휘인 포옹”처럼 쉼표를 닮는다. 성장을 멈추라는 욕망을 쉬라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나호열 지음. 시인동네 펴냄. 119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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