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어디론가 떠나는’ 계절이다. 이때쯤이면 집 떠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까지 괜스레 엉덩이가 들썩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산과 강과 바다가 피서객들로 가득 메워지는 지금은 ‘집 나서면 고생’일 수밖에 없다. 해외로 가는 여행 역시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한다. 쉬러 가는 것인지 전쟁터로 떠나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생각을 바꿔볼 필요도 있다. 휴가는 한적한 가을이나 겨울쯤으로 미뤄두고, 한여름에는 마음으로 세상을 누벼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도 꽤 많다. 방에 앉아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과거에 다녀온 여행 사진을 펼쳐놓고 더위를 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게 무슨 재미냐고?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썩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업이 여행작가인 나도 이 계절에는 집을 나서기가 두렵다. 더위도 더위지만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을 놓을 수는 없으니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면서 밀린 글을 쓴다. 즉, 추억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 여행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은 계절과 반대로 떠나는 것이다. 여름에는 가장 추웠던 곳을, 겨울에는 더웠던 곳을 찾아가면 된다. 따라서 지금은 한겨울 속으로 떠나는 시즌이다. 내게 가장 추웠던 여행은 오로라를 찾아서 북유럽 곳곳을 헤맸던 때지만, 방송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을 촬영하러 터키에 갔을 때 넴루트 산을 오르던 기억도 여전히 강렬하다. 넴루트 산은 터키 남동쪽에 있는 해발 2150m의 산이다.
겨울에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 않는 넴루트 산에 올라가자는 제안을 한 건 나였다.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들이 잘 안 가는 곳을 소개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나는 그 전해 여름에 정상까지 다녀온 터였다. 마을을 출발할 때는 하늘이 멀쩡하더니, 산 입구에 들어서면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눈이 빠른 속도로 길을 지워가고 있었다. 그럴 땐 소소한 ‘구분’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절감하고는 한다. 이곳과 저곳, 너와 나, 네 것과 내 것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은 더욱 무섭게 쏟아졌다. 기온도 뚝뚝 떨어졌다. 신발은 젖어가고 안으로 들어간 눈은 계속 체온을 빼앗았다. ‘이러다가 저체온증에 걸리기 십상인데….’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오르는 PD와 카메라 감독을 보며 신음조차 참아야 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 PD가 다가왔다.
“작가님, 먼저 내려가시지요? 이 정도 눈이면 도저히….”
“내가 먼저 내려가면 촬영은 어쩌려고요? 출연자 없는 다큐 찍어봐야 소용없잖아요. 갑시다. 아직은 견딜 수 있으니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봅시다.”
PD도 카메라 감독도 다시 묵묵히 산정을 향해 걸었다. 문제는 길이었다. 방향을 잃은 지는 오래였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 앞서간 희미한 발자국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렸다. 산행 전문가의 발자국이 틀림없었는데…. ‘앞서간 발자국 하나가 생명의 끈이 될 때도 있구나. 나는 뒤에 걸어올 사람을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발자국을 찍어본 적이 있던가.’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자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는 순간, 눈 위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 감독은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의 내가 거기 있었다. 그날, 결국 1900m쯤에서 돌아 내려왔다. 훗날 돌아와 편집된 다큐를 보는데 느닷없이 10년은 늙어버린 사내 하나가 눈 위에 앉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 꺼풀 벗겨져 훨씬 정직해 보이는 내가 도시에서는 낯선 모습이었지만,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까워 보였다.
꽤 지난 얘기지만 무더운 여름이면 여전히 ‘유효한’ 추억이다. 그래서 더위를 참기 어려울 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는 한다. 올여름에도 그 정도면 족하다. 나는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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