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기술이 만든 마법의 세계

머니투데이 백선기=이로운닷넷 기자 | 2017.07.22 08:00

[쿨머니, 우리 동네 히든챔피언] 3D 프린팅 기술로 장애인의 꿈을 키워주는 예비사회적기업 그립플레이

편집자주 | 편집자주: 나랏님도 풀지 못한다는 숙제를 척척 해결해 나가는 이웃들이 있다. 돈벌기는 기본! 우리 동네에 일자리를 만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환경을 지키는 착한 기업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히든 챔피언’ 즉 대중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장을 이끄는 우량기업의 새로운 모델이 아닐까? 머니투데이는 서울형 사회적기업 이로운넷과 공동으로 '우리 동네 히든 챔피언'을 발굴해 그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릴 줄 알았다. 손 근육에 힘이 빠져 붓은커녕 연필조차 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육병을 앓고 있는 요한이는 2년 전 '플레이 그립'이라는 필기 보조기구를 사용하면서 희망이 생겼다. 다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지난 4월에는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50여 명과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미술의 세계에선 불가능이란 없었다. 요한이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축구를 하며 운동장을 누볐다. 요한이 어머니 문윤희씨는 “희망·용기·자신감 회복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 한때는 무용수를 꿈꿨던 김형희 씨는 25년 전 교통사고로 졸지에 전신마비 환자가 됐다. 사고의 상처를 딛고 재활치료를 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손 감각이 없는 그가 붓을 쥐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아 붓을 고정시키곤 했죠. 하지만 자꾸 떨어져 힘들었어요.”

어느 날 그의 전시회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립플레이 이준상 대표다. 필기 보조기구를 보여주며 한 번 써볼 것을 권유했다. 보조기구는 김 씨의 작품세계에 변화를 몰고 왔다. 큰 붓을 들기 힘들어 포기해야만 했던 대형 작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살려 장애 아동들에게 그림 멘토를 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쓰고 그리는’ 기쁨 선물

그립플레이가 제작한 보조기구에 펜을 꽂아 그림을 그리는 소년/사진제공=그립플레이

그립플레이는 3D 프린팅 기술로 필기 보조기구를 제작 판매하는 예비 사회적기업이다. 근육병이나 척추장애, 뇌병변 질환으로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다. 필기 보조기구는 손바닥의 중앙에 끼워 쓰는 형태이다. 이 보조기구에 연필이나 붓을 장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식사보조기구나 타이핑 보조기구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재질은 친환경 소재인 옥수수 전분을 활용해 만들었다.

2013년부터 ‘장애 아동 학습 보조기구 지원법령’에 따라 장애 아동이 있는 학교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의무적으로 장애 보조기구를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필기 보조기구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해 왔다. 수십만 원이나 하지만 체형이 다르고 고장이나 파손시 A/S 받기도 힘들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립플레이는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해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했다. 3D 프린팅 기술 덕분이다. 처음에는 가가호호 방문해 스캐너로 손 모양과 치수를 측정해야 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측정이 가능하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디자이너는 측정값을 분석해 설계에 들어간다. 완성된 설계도 정보를 3D 프린터에 입력하면 얼마 후 제품이 완성된다. 상담부터 제품의 출력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주 내외이다. 그립플레이는 이같은 일련의 공정을 담은 플랫폼을 개발해 3D 프린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디자인 설계를 마친 3D 모델링 파일을 gcode로 변환해 출력 작업이 한창인 3D 프린터/사진=이우기/사진제공=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그립플레이는 올해 초 전라남도 교육청과 협약을 맺고 원격시스템으로 2건의 필기 보조기구를 만들었다. 인도네시아 한 쇼핑몰 업체로부터는 기업의 사회 공헌 프로젝트로 보조기구 제작을 의뢰하고 싶다는 제안도 받았다.

이런 혁신성과 품질을 인정받아 그립플레이는 설립 2년 만인 지난해 매출 1억 원을 달성했다.
2016년에는 보조기구가 장애인 고용공단 건강보험 수가 지정 품목으로 등록됐다. 4대 보험에 가입된 근로장애인들은 무상으로 제품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을 향한 기술... 소외계층에게 다양한 경험 제공
그립플레이는 기술의 힘으로 장애인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사회적 미션이다. 이준상 그립플레이대표는 “기술이 돈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쓰여야 한다”며 “이를 통해 소외계층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이 특정 계층이 아니라 모두에게 골고루 퍼져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준상 그립플레이대표/사진=이우기/사진제공=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그립플레이는 단순히 필기 보조기구를 제작해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수학교와 재활병원을 돌며 ‘찾아가는 스튜디오’라는 미술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미술교육을 통해 성장기 아동들에게 꿈과 희망, 도전의 동기를 부여하고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 대표는 “쓰거나 그릴 수 없다는 건 바로 교육의 격차로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필기 보조기구 제작과 그림 수업은 기업의 후원이나 펀딩을 통해 저소득층 장애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다. 지난해와 올해 250여 개의 보조기구가 만들어졌고 그와 비슷한 숫자만큼 장애아동들이 미술 교육을 받았다. 또 이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2차례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그림형제의 동화 '브레맨음악대'를 주제로 보조기구를 활용해 장애 아동이 그린 그림 전시회/사진제공=그립플레이


최윤정 그립플레이 디자이너는 전시회를 들렀다가 그립플레이가 품고 있는 사회적 가치에 반해 동참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지만 자신이 만든 제품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는 것을 볼 때 흐뭇하다고 말했다.

“ 얼마 전 필기를 할 수 없어 시험을 포기했던 40대 남성분이 제가 설계한 보조기구를 끼고 시험에 도전해 1차에 합격했어요. 누군가 접어뒀던 꿈의 나래를 다시 펼 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최고의 매력입니다.”

혁신기술 정보 공유... 대자본 중심 탈피 지역사회 스스로 문제 해결

이 준상 대표는 앞으로 보조기구 제작방법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계획이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개발 소스를 다운로드해서 자신이 필요한 제품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 대표는 “ 외국에서는 의족과 의수를 만드는 기술을 이미 공개했다”며 “ 정보 공유를 통해 기술이 대기업이나 대자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이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립플레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 최윤정디자이너(왼쪽에서 두번째)를 포함해 4명이다./사진=이우기/사진제공=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조각을 전공한 이준상 대표가 그립플레이를 창업하게 된 계기는 학창시절 게시판에 붙었던 한 장의 포스터에서 비롯됐다.

“장애인과 함께 떠나는 해외탐방 여행이었어요. 준비하는 첫 단추부터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무심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입구에 턱이 있어 휠체어를 탄 친구가 들어올 수 없었어요. 청각장애인들과 이야기를 할 땐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해야 했습니다. 제가 몰랐던 세상이지요.”

그때 함께 여행 한 것을 인연으로 이 대표는 졸업 후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에서 장애인 예술가들의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이때 맞춤형 필기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3D 프린터 기술을 독학으로 익혔고 전문성을 더하기 위해 2015년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디자인 싱킹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만큼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가미한 디자인으로 일반인들도 한 번 써보고 싶도록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필기 보조기구가 준 선물은 ‘희망’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만큼 꿈을 꾼다고 봅니다. 만일 경험의 크기가 꿈의 크기를 결정한다면 장애가 있어도 돈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

“안돼.” “난 할 수 없어.”를 되풀이하던 요한이는 요즘 화가의 꿈을 꾼다. 요한어머니는 아들의 그림 중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나는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요한군 그림/사진=문윤희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다 보니 볼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그 그림을 볼 때면 더 높은 곳에서 더 먼 곳까지 드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제 마음이 보이거든요.”

따뜻한 보조기구가 그려 가고 있는 세상은 ‘꿈’ 그리고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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