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법인 평화의마을 문 안으로 들어서면 장애는 남다름이 된다. 장애인은 장인이 된다. 26명의 장애인 직원과 5명의 훈련생, 사회복지사 등 10명의 비장애인 직원들은 장애인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맛있어서 잘 팔리는 소시지를 만들었다.
제주의 고급리조트 '카이로스'를 운영하는 윤순황 대표는 "리조트 고객을 위해 차별성 있는 조식 메뉴를 개발하려다 제주맘 소시지를 만났다"며 "국내에서 만드는 걸로는 최고의 맛이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장애인 일자리 만드는 좋은 기업이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매출은 13억3000만 원 남짓했다. 아직은 소기업 규모다. 고추, 매실 등 재료를 직접 키우고 간장 등 양념도 직접 담가 발효식으로 만드는 슬로푸드 수제 소시지라 시장 반응이 좋아도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적기업들이 영세한 제주 사회적경제계에서 평화의마을은 '규모의 경제를 이룬 사례'로 꼽힌다. 강종우 제주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은 "제주맘이 규모의 경제를 이루게 된 건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이 소시지 기술 배우러 독일로 찾아갈 정도로 열정을 쏟아 제품력을 높인 덕분"이라며 "로컬푸드에서 체험서비스까지 6차 산업을 이끄는 롤모델로 꼽히고 있다"고 평했다.
여기까지 17여년이 걸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함께 시행착오를 극복해가면서 천천히 발전했다.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부닥치고 품어주면서 이들은 '괸당'이 됐다. 제주 사람들이 '친족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든 '괸당'은 부모들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던 변화를 장애인 직원들한테 일으켰다.
미리 알고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말을 느리게 하는, 수줍은 많은 청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적 장애 2급인 송종복 씨(34) 얘기다. 한때 노숙인 같은 모습으로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다던 그는 지금은 직장 내 패셔니스타이자 장애인 1호 승진 사례가 됐다. 인터뷰를 하던 날엔 대전 출장을 막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비행기와 시외버스를 타고 제주 바깥으로 출장을 다니는 건 그한테 별로 어렵지 않은 일로 보였다. 정말 심각한 장애가 있었던 걸까?
"말 더듬는 게 심했어요. 긴장하면. 평화의마을에 와서 달라졌어요. 삶을 새로 시작한 계기였어요. 그전에는 생활이 일정치 않았어요. 자신감도 없고 자기관리도 안 했어요. RPG(롤플레잉게임)에 빠져 PC방에서 지냈어요. 밥도 거의 안 챙겨먹었어요. 평화의마을 선생님들이 잘해줬어요. 동료들도 잘해줬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게임의 유혹은 질겼다. 월급이 수중에 들어오면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2박3일씩 출근을 거르는 때도 있었다. 그랬던 송씨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58)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활은 쉽지 않아요. 이끌다 힘들어서 손을 놓으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버려요. 한 사람이 놓기 전에 다른 사람이 그걸 잡아주고, 또 다른 사람이 잡아주고, 그러다 보면 예측하지 못했던 어느 순간, 변화가 와요. 그러니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이런 사례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있으면 가위로 잘게 찢어 변기에 넣던 소년이 있었다. 학교 왕따 시절의 강박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평화의마을 앞마당엔 어느날 포크레인이 들어왔다. 꽉 막힌 하수관을 뚫고 보니 붉은악마 단체 반팔티 따위 그가 싫어하던 물건들이 잔뜩 나왔다.
이 원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예 자기가 싫어하는 물건을 태우는 일을 맡기자!' 소년은 소각장 담당자로 임명됐다. 15년 후 소년은 강박적인 특성을 살려 어떠한 불량품도 놓치지 않는 꼼꼼한 검수원으로 거듭났다.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장애'로 여겨지던 특성은 '역량'으로 바뀌었다. 비 오는 날에도 밭에 물을 주는 강박증은 제품 안전을 철저히 지키는 꼼꼼함이 된다. 공격성은 야무짐이 된다. 평화의마을에서 12년째 생산을 맡고 있는 고승철 공장장은 "우리 작업장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서로의 역량에 맞는 작업을 하면서 하나의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동료들이 있을 뿐이죠."
"비록 어떤 '기능'이 남보다 약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더 발전하기를 바라고 누군가 더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와 비해도 약하지 않아요. 다만, 그걸 발현할 기회를 얻기가 남보다 어려울 뿐이지요."
장애인이 일을 통해 사회 속에서 자신을 발현하도록 돕겠다고 결심한 이 원장이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이 적은 제주로 건너온 건 2000년. 처음엔 훈련생 모집조차 어려웠다. 이웃이면 누구든 '삼촌'이라 부르며 돕는 제주 특유의 '괸당' 문화는 의외의 걸림돌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돌봐주다 보니 장애인과 부모들은 직업 재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내 자식은 보낼 필요 없다'는 부모들을 '돌아가신 후에 애 혼자 어찌 살지 생각하시라'며 설득해 한 명씩 훈련생을 모았다.
이들은 장애인을 수혜자에서 동료직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힘을 모았다. 입사 8년차 정선열 팀장은 "초창기 사회복지사 선생들이 제주시, 애월 등 제주 전역에서 오는 훈련생들한테 출퇴근 훈련을 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며 "지역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통합되려면 그 지역사회의 시설을 이용해야 한다는 철칙은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의마을은 이들에게 단순히 '월급 주는 직장'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입사 11년차 김덕윤 팀장은 "월급날이 되어도 통장에 얼마 찍히는지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일이 내 일이니까요"라고 그는 덧붙였다.
"한국의 직업 재활 역사는 2000년대에 시작됐어요. 장애인을 세금의 수혜자에서 세금 기여자로 바꾸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국내 고용 장애인 3명 중 1명 비임금근로…'우리들의 천국' 되려면
이런 현실에서, 장애인이 직원 10명 중 7명이고 그들 모두 정규직인 사회적기업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들만의 천국 같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네마다 이들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의 '괸당'이 생긴다면 어떨까. 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직업이 비장애인한테도 좋은 직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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