毒에 빠진 30년, 보툴리눔으로 바이오 새역사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 2017.06.29 04:30

[한국제약 120년을 이끈 사람들]13-①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

편집자주 | 한국 최초 신약은 1897년 한 궁중 관료에 의해 만들어졌다. 궁중비법을 토대로 만든 이 약은 '애민정신'에 뿌리를 뒀다. 애민정신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한국 제약산업의 키워드다. 오늘날 우리가 '제약주권'을 갖기까지 제약 선구자들의 피와 땀은 120년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들에게 진 빚이 작지 않다. 법고창신. 한국 제약사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발자취를 좇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카이스트 시절 정현호 대표/사진제공=메디톡스
지난 2월13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됐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파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 휴대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정부 기관이었다.

휴대폰 저편 남자는 김정남이 보툴리눔 톡신에 의해 피살됐을 가능성이 있냐고 물었다. 정 대표는 흐릿한 CCTV 영상 속 김정남이 여성들의 공격을 받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걸 보고는 "보툴리눔 톡신 가능성은 없다"고 곧바로 대답했다. 치사량 이상 보툴리눔 톡신에 노출돼도 즉사하지 않을 뿐더러 한동안 활동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미생물에 인생 건 모범생 = 정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툴리눔 톡신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보톡스'로 유명한 세계 1위 보툴리눔 톡신 기업 엘러간조차 정 대표가 이끄는 메디톡스 기술을 사갈 정도다.

정 대표의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였다.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를 여행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카이스트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까지, 그의 인생에 기업인은 눈곱만큼의 공간도 없었다. 오히려 사업에 부침이 심했던 경찰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보며 사업은 할 게 못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몰랐어요. 어느날 창고에 가발이 쌓여 있길래 '이번에는 가발 사업이구나'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죠"

정현호 소년은 광주에서 여수로, 여수에서 다시 광주로, 아버지 사업이 흥하거나 기울 때마다 터전을 이리저리 옮겨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마땅히 정 붙일 곳 없던 그에게 공부와 미래 과학자 꿈꾸기는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학에 진학할 때 그의 꿈은 수정됐다. 궁극적이면서 근본적인 그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어졌다. 그가 선택한 것은 미생물학이었다.
2012년 5월 오송 제2공장 기공식/사진제공=메디톡스

◇보툴리눔 톡신과 만남과 창업 =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최신 실험장비가 풍부했던 카이스트로 향했다. 보툴리눔 톡신과 조우하게 된 건 1988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막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다.

정현호 대표의 은사이자 훗날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을 지낸 양규환 교수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가져온 보툴리눔 톡신 균주가 눈에 들어왔다.

"양 교수님이 가져온 균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맹독인데 치료제로 쓰인다는 걸 알고 대부분의 미생물학도가 선택하는 독성학 대신 독소학을 논문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보툴리눔 톡신 제품 원조인 미국 엘러간 '보톡스'는 사시교정용 치료제 정도에 불과했다. 간간이 주름개선 효과가 학계에서 소개됐지만 미국에서조차 미용시술용으로 승인을 얻지 못했다.

정 대표가 연구가치를 높게 본 건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잠재된 사업가 DNA가 꿈틀 댄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국내 1호 보툴리눔 톡신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객원연구원을 마친 정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교수를 거쳐 2000년 메디톡스를 창업했다.
메디톡스의 보툴리눔 톡신 제품 '메디톡신'/사진제공=메디톡스

이어 2006년 국내 1호 보툴리눔 톡신 제품인 '메디톡신'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까지 정 대표는 제품만 만들면 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제약사도 이 약을 쳐다보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슬라이드 필름 비용이 아까워 종이에 출력해서 다닐 정도로 자금난은 심각했다.

◇본토에서 알아본 '혁신형' 보툴리눔 = 결과적으로 제약사들의 무지는 정 대표와 메디톡스에 '약'이 됐다. 스스로 시장 개척에 나선 정 대표는 성형외과 환자들 사이의 입소문에 힘입어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국내에서 연간 100억원대 매출을 올리던 엘러간은 뛰어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앞세운 메디톡스에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메디톡스는 200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고 2013년에는 엘러간에 액상 보툴리눔 톡신 '이노톡신' 기술을 3억6200만달러(약 4100억원)에 수출했다.

2014년에는 보툴리눔 톡신에 포함된 비 독소 및 동물성 성분을 완전히 제거해 보톡스 내성을 줄인 신제품 '코어톡스'를 개발했다. 피부미용 시장에서는 보툴리눔 톡신과 함께 '물광 주사'에 쓰이는 히알루론산 필러(뉴라미스)도 내놓았다.
메디톡스 오창공장/사진제공=메디톡스

메디톡스는 현재 세계 60여개국에 수출된다. 국내 시장점유율은 40%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수출 비중은 60%에 이른다.

정현호 대표의 꿈은 보툴리눔 톡신을 당뇨나 뇌질환 등 특정 질병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면역치료제로 개발하는 것이다. 보툴리눔 톡신이 우울증 원인 신경 활동을 둔화시켜 우울증 치료제로까지 쓰일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까지 마련된 상황이다.

메디톡스의 미래는 보툴리눔 톡신과 필러, 기능성 프로바이오틱스 등 3대 주력 제품군으로 무장한 바이오 강자다. 5년 내 매출 1조원을 달성하고 글로벌 톱 20 바이오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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