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와 노비 사이… 조선에서 공주로 산다는 것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7.06.17 07:23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0 – 경혜공주 : 단종 누나의 기구한 운명


공주가 담을 넘는 것은 기본이요, 만취에 외박을 일삼는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저잣거리에서 대거리는 예사. 이 똘기 충만한 공주를 어찌 할까. 왕실의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에서 선보인 혜명공주는 그래서 친근하다. 틀에 박힌 조선 공주의 초상을 찢고 나와 통통 튀는 언행으로 흥미를 자아낸다.

조선시대 임금의 딸은 왕비가 낳은 ‘공주’와 후궁 소생인 ‘옹주’로 나뉜다. 세자의 딸도 적녀(嫡女)는 ‘군주’, 서녀(庶女)는 ‘현주’라고 불렀다. 왕녀들은 궁궐에서 조신하고 기품 있게 자라났다. 겉으로 보면 엽기공주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속사정까지 알 길은 없다. 그녀들의 명랑한(?) 성장기가 전해지지 않으니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엽기적인 그녀’의 혜명공주는 국왕인 아버지가 권신에게 위협받고, 어머니는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는데 이 때문에 공주의 입지도 위태로워 보인다. 역사에서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가 비슷한 처지였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생모 현덕왕후를 잃었고 숙부 수양대군이 부왕의 자리를 노렸다. 게다가 극중 공주처럼 미모까지 출중했다고 한다.

경혜공주는 1436년 문종이 세자 시절 후궁 권씨에게서 본 금지옥엽이다. 이후 세자빈이 된 권씨는 1441년 아들을 출산하자마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원손(元孫)이 바로 후일의 단종이다. 공주는 6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 속에 무럭무럭 컸다. 그녀가 궁궐 밖으로 시집간 것은 1450년의 일이었다.

왕녀는 대개 십대 초반에 결혼했는데 이때 양반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배필을 간택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 가운데 공주와 옹주의 배우자를 ‘부마’라고 불렀다. 경혜공주의 경우 할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미루다가 세종의 국상 직전에야 혼례를 올렸다. 상중에는 국혼을 할 수 없고, 삼년상 다 치르면 ‘노처녀’가 되니, 더 늦기 전에 서두른 것이다. 공주의 짝은 참판 정충경의 아들 정종으로 정해졌다.

당시 청년들에게 왕녀와의 결혼은 어찌 보면 남자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젊은 나이에 정승, 판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다 나라에서 집과 땅과 노비까지 듬뿍 하사받을 테니…. 그러나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처럼 잘 나가는 청년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부마는 정상적인 벼슬길로 나아가 나랏일을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국가 예식이나 사신 접대에 참여하는 게 고작이었다. 유자(儒者)로서 세상에 포부를 펴기 어려웠다.

게다가 왕녀가 일찍 죽더라도 그 배우자는 재혼할 수 없었다. 공주나 옹주가 세상을 떠난 뒤에 부마가 얻은 부인은 (양반가 출신이라 해도) 첩으로 처리했고, 그 자식도 서자로 삼았다. 따라서 야심만만한 명문가 자제에게 이 결혼은 발목 잡는 족쇄에 가까웠다.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출세의 징검다리를 놔주는 역할이었다.

이런 부마의 울분 때문이지, 부부간의 불화도 적지 않았다.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는 남휘와 혼인했는데 남편과 사이가 나빴다. 남휘는 다른 사람의 첩을 빼앗아 와서 공주의 체통을 깎아내리는가 하면 1424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처남 세종이 이 자를 따끔하게 혼내주려고 유배보내기도 했다. 예종 때 반역 혐의로 처형된 남이는 이들 부부의 손자였다.


어쨌든 가정불화야 신분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왕녀들은 대체로 평탄한 인생길을 걸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경혜공주에 책봉된 그녀에게도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이 보장되어 있었다. 혹여 시가에서 죄를 지어 집안이 몰락하더라도 왕녀는 건드리지 못했다. 문제는 뒤를 받치는 친정, 그러니까 왕실이었다. 친정이 정치 격변에 휩쓸리면 아무리 공주라도 운명이 기구해지기 마련이다.

비극은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며 막이 올랐다. 뒤를 이어 경혜공주의 동생 단종이 12살 나이로 보위에 앉았다. 수렴청정해줄 대비조차 없는 어린 임금에게 친누나는 버팀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주는 부마 정종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며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이 되었고 그녀도 곤두박질쳤다.

1455년 수양대군, 즉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어린 임금은 상왕으로 물러났고, 부마 정종은 유배를 떠났다. 경혜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1456~1457년에는 사육신과 금성대군이 세조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했는데, 이 연이은 거사가 단종의 죽음을 앞당기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정종마저 1461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며 공주의 신세는 적막해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혜공주는 만삭의 몸으로 6살 아들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나야 했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된 것이다. 일국의 공주에서 관노비로 떨어지다니 드라마틱한 추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순천부사가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는 거부했다. 그녀는 관아로 나아가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천생 공주의 호령에 부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네 이놈! 나는 국왕의 딸이다. 죄를 입어 이곳까지 왔지만, 일개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키느냐?”(연려실기술)

민심을 의식한 세조는 그녀를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경혜공주는 어린 아들과 젖먹이 딸을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맡기고 비구니가 되었다. 아이들을 뒤로 하고 절집으로 들어가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반면 세조의 딸 의숙공주는 정현조를 ‘공주의 남자’로 맞아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는 정난일등공신이자 영의정에 오른 정인지의 아들이었다. 뒤바뀐 삶의 주인공답게 의숙공주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끝내 자식은 보지 못했다.
권경률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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