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7.06.03 11:06

<66> 늦가을 임자도의 평화로움

편집자주 |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광해수욕장. 철은 지났지만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일 때문에 여행을 자주 떠나지만,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계절이나 장소는 가능하면 피한다.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기는커녕 소음 속에서 사람만 구경하다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름에 바닷가에 가거나 단풍철에 산에 가면 무조건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들과 반대로 여행을 간다.

임자도를 늦가을에 찾아간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잠시라도 고즈넉한 섬 풍경 속에 젖어보고 싶었다. 봄에는 튤립으로 온통 물들고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붐비지만, 외지인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가을 이후에는 임자 없는 시간만 널려 있는 섬이 바로 임자도다. 내가 찾아간 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비가 그쳤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낮은 곳에 내려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면적은 40.85㎢, 인구는 3426명(2011)이다. 신안군의 최북단으로 목포시에서 66.6㎞ 거리에 있으며…(중략) 임자도라는 명칭은 섬이 들깨 알(荏;들깨 임)처럼 작고 섬 주위에 아들(子)같이 작은 섬이 많은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며, 사질토 토양에서 자연산 깨가 많이 생산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빌려온 임자도에 대한 설명이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별 특별한 게 없는 섬이다. 굳이 눈에 띄는 내용을 찾는다면 깨와 관련된 설명. 임자도의 ‘임자’는 들깨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임자(荏子)다. 옛날에는 유배를 간 사람들이, 사질토에서 자라는 깻잎을 뜯어먹으며 연명할 정도로 척박한 섬이었다고 한다.

신안군 지도 항에서 배를 타고 20분쯤 걸려 임자도 진리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첫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음식점이나 가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첳 목적지를 해수욕장으로 잡았다.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가 12km로,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면 1시간20분이나 걸린다고 한다. 철 지난 해수욕장 역시 쓸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넓은 해수욕장에 점, 점, 점 박힌 몇 사람뿐이었다.

끝없는 길을 달려도 주민들을 만날 수 없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잡았다. 새우젓 집산지를 찾아가볼 심산이었다. 임자도는 병어나 민어 같은 어류가 많이 잡히기도 하지만 새우젓으로도 유명하다. 새우젓배가 오간다는 전장포로 가면 사람이 좀 있을까? 사람을 피하고 싶어 섬까지 가서 사람을 찾아다니는 모순은 또 무엇인지. 내가 생각해도 좀 우스웠다. 아무튼 길 위에도, 논밭에도 심지어 바다에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가움으로 눈이 환해졌다. 넓게 펼쳐진 밭, 밭가에 서 있는 소나무 서너 그루,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밭 가운데서 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구나…. 그 뒤로도 자전거 속도만큼 느리게 차를 몰았지만 사람 없는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

드디어 ‘새우젓의 고향’이라 불리는 전장포.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새우젓마트’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 앞을 얼씬거려 봐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동네를 빠져나오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7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14번째 큰 섬, 수천 명이 땅을 파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기대에 살아가고 있는 섬. 그곳에서 만난 주민이라고는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한 분뿐이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임자도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섬, 그래서 조금 고독하고 쓸쓸한 섬. 하루 종일 앉아서 사색에 빠져도 방해할 사람 하나 없는 섬. 아! 이 모든 풍경이 나를 위해 차려진 것이었구나. 바로 내가 찾던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내 안에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뿌듯한 그 무엇. 시간은 도시보다 훨씬 천천히 흘러서, 하릴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녀도 누군가 호주머니에 자꾸 시간을 넣어주는 것 같았다. 시간마저 임자가 없는 섬에서 맞은, 생애 가장 길고 평화로운 날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갔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즐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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