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이 아내 쫓아낸 날…"조강지처를 어찌 버리느냐”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7.06.03 07:36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9-단경왕후 : 233년 만에 돌아온 7일의 왕비


“옛 왕비 신씨가 물러난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사귄 벗은 잊지 않고, 고생을 함께 한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후환을 염려하여 사사로이 임금을 겁주고 국모를 병아리 내몰듯 쫓아냈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났으니 신씨를 다시 왕비로 삼아 인륜을 바로잡으소서.”(중종실록)

1515년 8월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상소를 올려 사가에 거처하는 중종의 본부인 신씨를 불러들이라고 청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한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지는 등 괴이한 징조가 잇달았다. 이럴 때 임금은 하늘을 달랠 의견을 구하는데 두 사람이 신씨 복위를 거론한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는 중국 연나라의 옛 고사도 곁들였다.

드라마 ‘7일의 왕비’는 바로 이 여인, 단경왕후 신씨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단경왕후는 1739년 영조가 그녀를 복위시키면서 붙인 시호다. 그 전까지 신씨는 무려 233년간 정변의 억울한 희생양으로 남아 있었다.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이 쫓겨나고 진성대군이 즉위한 중종반정의 그날, 왕비의 운명은 역사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밤 3경에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나아가자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메웠다. (반정 수뇌부는) 먼저 병력 일부를 진성대군 집에 보내 거사한 사유를 아뢴 다음 호위하게 하였다. 또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 등의 집으로 달려간 용사들은 왕명이라며 그들을 끌어내 쳐 죽였다.”(중종실록)

단경왕후는 거사 당일 반정군에게 살해당한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의 누이가 연산군에게 시집가면서 이 집안은 왕비를 배출한 외척이 되었다. 단경왕후 또한 1499년 13살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혼인했다. 남편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소생으로 폭군에게는 이복형제였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남편을 임금으로 옹립하다니 그녀로서는 얄궂은 운명이다.

사실 신수근은 정변의 기미를 사전에 알아챘다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처남으로 좌의정에 오른 실세였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거사를 암시하며 넌지시 운을 띄웠다. 누이냐 딸이냐,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신수근은 ‘임금이 폭군이지만 총명한 세자를 믿는다’며 자리를 박찼다. (뒤에 영조는 이 충성심에 감동하여 그이에게 영의정을 추증했다.)

단경왕후도 아버지 못지않게 굳센 여인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그날 군사들이 말을 타고 집으로 몰려오자 진성대군은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자결하려 했다. 그녀는 남편을 뜯어말렸다. “말의 머리가 집을 향하면 잡으러 온 거고, 말의 꼬리가 집을 향하면 지키러 온 것”이라며 급박한 순간에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진성대군은 반정세력의 추대를 받아 그날 부로 즉위식을 올렸으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본부인인 신씨도 신하들의 하례를 받으면서 중궁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슬픈 운명의 전주곡은 궁궐에서 흘러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대비 정현왕후의 왕비 책봉 전교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친정에 대한 대대적인 유배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9월 9일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주역들이 새 국왕에게 떼로 몰려갔다. 그들은 “신수근을 제거했는데 그 딸이 왕비가 되면 인심이 불안해진다”면서 신씨를 내치라고 종용했다. “조강지처를 어찌 버리느냐?” 중종은 소심하게 저항했지만 분위기가 험악했다. 결국 그날 저녁 비운의 왕비를 태운 가마가 경복궁 건춘문을 나와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박원종 등은 왕비가 될 여인의 아비를 죽였기에, 나중에 그녀가 임금이나 후계자를 움직여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후환은 싹을 잘라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중지를 모았다. 자신들을 보전하기 위해 사사로이 국모를 몰아낸 것이다. 이는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두에 언급한 박상과 김정의 상소도 그걸 지적하고 있다.

“역경에 이르기를 ‘남편과 아내가 있은 뒤에 부모와 자식이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은 뒤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임금과 신하가 있은 뒤에 위와 아래가 있고, 위와 아래가 있은 뒤에 예의(禮義)를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요, 통치의 근원입니다. 처음에 잘못이 있었다면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종실록)

재위 중에 새 왕비들(장경왕후, 문정왕후)을 차례로 맞았지만, 중종은 조강지처 신씨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치마바위의 전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야기 속 중종은 틈만 나면 궁궐 누각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 아내를 떠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산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에다 자신의 붉은 치마를 펼쳐 화답하였다.

궁궐에서 나온 신씨는 잠시 딴 곳에 머물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의 본가로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사직동에도 또 다른 치마바위가 있다.) 중종이 정말 조강지처를 그리워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관심을 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집에 도둑이 들어 경비인원을 늘리는 등의 일화가 실록에 등장한다. 전설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다. 이런 작은 단서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민간의 생각과 정서가 더해져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739년 영조는 중종반정 당시 ‘공신들이 임금을 무시하고 협박한 죄’가 크다며 단경왕후를 복위시키고 온릉을 조성했다. 신하들의 당쟁에 진절머리 난 영조는 이런 식으로 왕권 강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치마바위 전설 같은 민간의 이야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다’는 뜻의 조강지처를 민심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조강지처는 애틋하고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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