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중퇴 '영업왕', 한방제약의 역사 되다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 2017.06.01 04:40

[한국제약 120년을 이끈 사람들]11-① "성실만이 유일한 무기"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

편집자주 | 한국 최초 신약은 1897년 한 궁중 관료에 의해 만들어졌다. 궁중비법을 토대로 만든 이 약은 '애민정신'에 뿌리를 뒀다. 애민정신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한국 제약산업의 키워드다. 오늘날 우리가 '제약주권'을 갖기까지 제약 선구자들의 피와 땀은 120년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들에게 진 빚이 작지 않다. 법고창신. 한국 제약사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발자취를 좇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최수부 회장/사진제공=광동제약
1935년생, 12세 소년 최수부가 가진 거라곤 초등학교 4학년 중퇴 학력에 웃음 띤 얼굴, 성실함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5남2녀 중 둘째인 수부 소년을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들게 했다.

참외장수, 담배장수, 엿장수까지 도둑질 빼고 안 해본 게 없었다. 초등학교 중퇴생에게 세상은 좀처럼 출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인이 동생에게 제약사 영업사원 자리를 주선했는데 내성적인 동생이 이를 마다하자 최수부가 대신 제약사를 찾아간 것이다. 딱히 적을 것 없던 이력서 한 통 들고 찾아간 고려인삼사에서 그는 보기 좋게 면접에서 떨어졌다.

◇성실 하나로 영업왕 등극 = 최수부는 자신을 면접에서 떨어뜨린 지사장 집으로 찾아갔다. 어려서부터 담배, 돼지, 엿, 해삼까지 안 팔아본 게 없으니 채용해달라고 떼를 썼다. 영업통 기질을 알아본 지사장은 결국 그를 채용했다. 1960년. 군에서 제대한 지 한 달이 채 안됐을 때다.
1960년대 광동제약사 창업초기 최수부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직원들./사진제공=광동제약

최수부 사원에게 주어진 임무는 경옥고 판매였다. 동의보감에 3년간 먹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도 다시 난다는 약이었다. 문제는 약값이었다. 한 개당 2만환이었는데 어지간한 회사원 한 달 치 월급이었다.

전략을 짰다. 수입이 괜찮을 것 같은 곳을 공략하기로 했다. 대상지는 을지로 일대 양복점이었다. 매일 이 일대를 출근하다시피 했다. 마침내 '미양사'라는 양복점 주인 부부가 경옥고를 두 개나 샀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최수부 사원은 입사 첫 해 영업왕에 오르고 퇴사하기까지 3년간 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영업에서 쌓은 인맥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63년 드디어 창업에 나섰다. 한방의약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광동제약사'가 출발이었다. 용산구 동빙고동 공장에서 처음 생산한 의약품은 경옥고였다.

그는 사장이자 영업맨이었다. 창업 초기 회사 매출의 50%를 최 사장 혼자 만들어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창업초기 경옥고/사진제공=광동제약

◇최상급 약재만 취급한 '최씨 고집' = 오늘날 광동제약을 있게 한 경옥고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새벽 경동시장 약재상에서 가장 좋은 약재를 사와서 정확한 함량으로 섞어 가마에서 오랜 시간 달여내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오래전 최수부 회장은 '최씨 고집'을 내세우며 좋은 재료만 엄선해 약을 만든다는 TV 광고에 직접 출연했다. 이 광고에는 그의 신념과 지난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광동제약사는 1973년 '광동제약'으로 사명을 바꾸고 2년 뒤에는 쌍화탕을 만들던 서울신약을 인수, 규모를 키웠다.


위기는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찾아왔다. 1977년 초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이가 광동제약 대리점을 개설했는데 물건을 판 뒤에도 본사로 돈을 입금하지 않았다. 본사에서 물건 공급을 중단하자 그는 자신이 보좌했던 국회의원을 찾아가 광동제약이 약사법을 어기고 탈세까지 했다고 거짓 제보를 했다.

일은 일파만파로 커져 최 사장은 결국 그해 7월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수감 됐다. 1심에서 징역 7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돼 풀려날 때까지 99일이 걸렸다.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최 회장과 광동제약이 입은 상처는 너무 컸다.
1980년대 구로동 본사 생산라인./사진제공=광동제약

◇마시는 비타민C '비타500'으로 재도약 = 광동제약은 카멜레온 같은 제약사다. 한방의약품에서부터 옥수수수염차 같은 음료까지, 품목을 한정하지 않는다.

품목 다변화 전략의 출발은 '비타500'이었다. 1993년 비타민C 제품 개발에 나설 때만 해도 비타민C 제품 대부분 정제나 과립이었다. 최 회장은 차별화 전략으로 드링크제를 고안했다.

2001년 2월 출시된 비타500은 출시 두 달 만에 400만병이 팔렸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판매량이 5배인 2000만병에 달했다. 출시 첫해 비타500 매출액은 53억원이었다. 2005년에는 한국능률협회로부터 명품브랜드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최수부 회장이 집중한 경영전략은 음료 사업을 통한 제2의 성장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지난해 광동제약은 개별기준 6363억원 매출을 올렸는데 음료 비중이 54.4%였다. 성장이 정체될 뻔한 상황에서 매출 다변화 전략이 통한 것이다. 광동제약은 현재 비만치료제와 비타민D 결핍 치료제 등의 개발을 통한 추가 성장 기반 마련에 한창이다.
1992년 송탄 GMP 공장 준공식/사진제공=광동제약

최수부 회장은 2013년 심장마비로 타계할 때까지 한방의약품 대중화에 생을 바쳤다. 한의사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협한다며 광동제약을 비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최 회장은 일일이 그들을 찾아다니며 시장을 키워야 우리 모두 산다는 말로 화합을 강조했다.

최 회장은 한국 CEO 연구포럼이 선정하는 '한국 CEO 그랑프리'(2006년), 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2008년), 경제정의실천시민 연합으로부터 '경제정의기업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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