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한 생이 지나가네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 2017.05.06 15:27

<99> 최혜숙 시인 ‘내가 잠든 사이에 지나갔다’


표제시 ‘내가 잠든 사이에 지나갔다’에서 화자는 새벽 잠결에 구슬픈 트럼펫 소리를 듣고 꿈을 꾸는 것이겠지 하면서 무시하고 잤다. 일어나보니 실제로 장례행렬이 지나간 것이다. 베갯잇도 축축하다. 화자가 실제 지나간 장례행렬이 아니라 꿈속 일인 줄 알고 꿈속에서 운 것인데 실제 베갯잇이 젖어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실제와 꿈, 꿈과 실제가 혼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재 살아있다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지만 꿈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지만 실제라는 것이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어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는, 장주와 나비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그러니까 우리 삶이라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생시인지 꿈인지 모르게 지나가는 것이라는, 다시 말해 생사일여, 즉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경계가 없다는 시인의 세계관이 투영된 시이다. 최혜숙의 생명관은 다음 시 ‘불시착’에서도 드러난다.

“기차가 지나가네// 잘못 찍힌 사진처럼/ 알 수 없는 얼굴들이 지나가네// 나무가 나를/ 흔들며 지나가네/ 햇살이 나를/ 비추며 지나가네/ 바람이/ 비가/ 눈이/ 나를 만지며 자나가네// 찬란한 별밭과/ 향기로운 꽃밭이/ 나를 스쳐가네// 한 생이 지나가네// 문득/ 지구별에 불시착했다는 생각”(‘불시착’ 전문)

화자는 달리고 있는 기차 안에 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과 나무와 햇살들. 그러면서 바람과 비와 눈이 화자를 만지며 지나갔다는 것이다. 자연과 한가지인 인간이 늙는다는 것은 비바람과 눈보라에 풍화되는 것이 아니겠나. 사람을 풍화시키는 데는 찬란한 별밭과 향기로운 꽃밭도 예외가 아니다. 어려운 순간도 늙고 행복한 순간도 늙어간다는 것이다. 다시 1연으로 돌아가서 “기차가 지나가네”라고 하는 것은 지나가는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시 ‘지나간다’는 계절의 지나감을 비유한 것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시간/ 시냇물에 발 담그고 노는데/ 하늘가 뭉게구름도 내려와 몸 담그며 지나간다”고 한다. 최혜숙 시인은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2014년 등단했다. 이번이 첫 시집이다. 시인의 시에는 불교제재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시 ‘수종사에 와서’는 수종사에 있는 오래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새소리와 천둥소리와 염불소리를/ 오백 년이나 쟁여 넣은 경전”이라는 것이다. 시 ‘청산행’에서는 “벚꽃이 환하게 핀 산모퉁이 돌아/ 허름한 암자가 보이는 언덕에서” 버스에 내리는 슬픈 아가씨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내가 잠든 사이에 지나갔다=최혜숙 지음. 현대시학 펴냄. 106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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