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시장에 가면 그 나라가 보인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7.04.15 09:54

<62> 터키 쿠르드족의 시장부터 파리의 생투앙 벼룩시장까지

편집자주 |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터키의 동부 반에 있는 가축시장. 여성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행지에서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시장을 찾아간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사는 모습뿐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종교와 문화가 고스란히 고여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 동쪽 끝에 있는 반(VAN)의 가축시장을 갔을 때도 목적은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었다. 쿠르드족들이 양과 소를 사고파는 이곳은 100km 이내에서는 가장 큰 시장이다. 현지인들은 1000년 전에 생긴 시장이라고 자랑하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1000명 정도가 모여든다. 그곳에 가면 이곳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방인이 나타나면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스스럼없이 다가 와 말을 붙이고 손을 내민다. ‘차이’를 한잔 사겠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 사진을 함께 찍자고 줄을 선다. 삶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절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찾아봐도 여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심지어 아이들까지 전부 사내다. 이유는 물론 종교 탓이다. 이 지역에서는 여자들은 시장에 갈 수 없다. 시장뿐 아니라 대중이 모이는 어느 곳도 마찬가지다. 같은 나라이자 역시 이슬람을 믿는 터키 서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같은 무슬림인데도,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다른 것이다.

쿠바에 갔을 때는 시장 구경을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사회주의 국가인 그곳은 내국인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서지 않는다. 생필품은 여전히 배급제고, 배급 물품 이외의 품목은 지정된 상점에서 팔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광객들만 이용하는 기념품 시장을 찾아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상품이 천편일률적이고 시장 특유의 흥청거리는 맛이 없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파리의 생투앙 벼룩시장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프랑스 파리에서는 맨 먼저 생투앙 벼룩시장을 찾아갔다. “파리까지 가서 하필 벼룩시장이냐”고 물으면, 역시 “사람 사는 모습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프랑스의 속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투앙 벼룩시장은 세계적인 벼룩시장으로 파리의 명물 중 하나다. 파리에는 이곳 말고도 유명한 벼룩시장이 두 곳 더 있다. 몽트뢰유 벼룩시장과 방브 벼룩시장. 생투앙은 셋 중 가장 크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시장에 들어서니 말 그대로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었다. 무엇무엇이 있더라고 설명하는 것보다는 없는 것부터 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을 비껴간 것들에게는 누군가의 그리움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애틋하고 정이 간다.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는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심심하지 않다. 생뚜앙 벼룩시장은 규모가 워낙 커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구역별로 조금씩 특색이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무엇을 사야겠다는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아무 곳이나 돌아다녀 보는 것도 괜찮다. 발길 닿는 곳 모두 시장이기 때문이다.

골동품 시장에는 말 그대로 수천 가지의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릇‧거울‧샹들리에‧옷‧인형, 각종 연장이나 도구들…. 그뿐이랴. 오래된 사진‧그림‧고지도‧음반 등은 뒤적거릴수록 신기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래된 우표는 물론 옛날에 누군가가 써서 보낸 엽서도 주인을 기다리고, 신문기사 스크랩도 당당하게 상품으로 나와 있었다. 집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트렁크에 싸들고 온 노부부가 한쪽에 신문지 만한 전을 펼쳐놓은 것도 구경거리였다.

지나가다 이것저것 뒤적거린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다. 음반가게 앞에서는 한참 머물렀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젊은 시절도 거기 있었다. 고지도(古地圖) 가게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혹시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표기된 옛날 지도를 발견할지 알아? 끝내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무언가 찾으며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다니다 보니 한나절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낯선 곳에서의 긴장 같은 건 저만치 멀고, 고향 집 마루에 앉은 듯 느슨해져 있었다. 파리지앵과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뼘쯤으로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딜 가든 여전히 시장을 찾아다닌다. 그 나라 사람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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