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후예, 대한민국 '백신주권' 기수로

머니투데이 이창명 기자 | 2017.03.30 04:10

[한국제약 120년을 이끈 사람들]4-① 녹십자 '대한민국 백신 독립' 허영섭 회장

편집자주 | 한국 최초 신약은 1897년 한 궁중 관료에 의해 만들어졌다. 궁중비법을 토대로 만든 이 약은 '애민정신'에 뿌리를 뒀다. 애민정신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한국 제약산업의 키워드다. 오늘날 우리가 '제약주권'을 갖기까지 제약 선구자들의 피와 땀은 120년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들에게 진 빚이 작지 않다. 법고창신. 한국 제약사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발자취를 쫓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1967년 수도미생물약품으로 출발한 녹십자의 올해 나이는 50살이다. 작은 나이는 아니지만 120년 역사인 한국 제약사(史)에서 녹십자는 중년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국내 의료계에서 녹십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연혁 이상이다. 녹십자 없는 백신주권은 상상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백신독립. 녹십자와 녹십자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고 허영섭 회장의 생은 이 말로 압축된다.

1981년 사장 당시 허영섭 녹십자 회장/사진제공=녹십자
◇송상의 후예, 제약인의 길을 걷다 = 녹십자 역사는 1967년 동물 백신을 제조·판매하는 수도미생물약품에서 출발한다. 수도미생물약품은 이때까지만 해도 제약사라고 보기 어려웠다.

제대로 된 제약사의 길을 걷게 된 건 극동제약으로 사명을 바꾼 1969년 이후부터다. 수도미생물약품의 주요주주였던 개성상인(송상) 출신 고 허채경 한일시멘트그룹 창업주가 경영권을 행사한 시기와 맞물린다.

고 허채경 창업주는 극동제약을 본격적으로 키워볼 생각에 독일 유학 중이던 둘째 아들 허영섭을 경영에 참여시켰다. 그가 경영에 참여하게 된 건 예정된 수순은 아니었다. 독일 아헨공대 금속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학생 허영섭이 1970년 군 복무를 위해 귀국을 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극동제약에 입사를 하게 된 것이다.

허영섭 입사 이듬해인 1971년 극동제약은 녹십자로 사명을 바꾸고 알부민과 플라즈마네이트 등 국내 최초, 세계 6번째 혈액제제 공장을 준공했다. 이전까지 수입에 의존한 알부민 공급이 순수 국내 기술로 가능해진 것이다.

녹십자 헤파박스-B
1980년 허영섭이 사장에 오르면서 녹십자의 백신 신화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첫 신호탄은 1983년에 쏘아 올렸다. 그해 녹십자는 12년간 연구해온 B형 간염백신 ‘헤파박스-B’가 제조품목 허가를 얻었다. 국내 최초 B형 간염백신이자 세계에선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이룬 성과였다.

헤파박스-B 개발은 단순한 백신 개발 이상 의미가 있었다. 국민병으로 불린 B형간염 백신 전량이 고가의 수입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헤파박스-B를 수입 백신의 3분의 1 가격에 공급해 백신 대중화를 앞당겼다.

그 덕분에 1970년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10~15%에 달하던 B형간염 표면 항원 보유율은 2000년대 후반에는 2%대로 크게 낮아졌다. 또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국제기구∙단체는 물론 60여 나라에 백신을 공급해 한국산 백신의 안전성과 우수성도 널리 알렸다.

허 사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84년 재단법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목암생명공학연구소는 녹십자 연구개발(R&D)의 산실로 지금까지 각종 질병의 예방과 진단,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 허영섭 녹십자 회장 취임 당시 모습/사진제공=녹십자
◇전염병 없는 나라를 꿈꾸다=2009년 4월 전 세계에 불어닥친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멕시코에서만 6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WHO는 판데믹(pandemic·전염병 대유행)을 선언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리나라 정부도 방역과 해외 여행자 검역을 강화하고 비축해둔 치료제를 시중에 공급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백신 생산이 가능한 일부 국가 이외엔 백신 확보가 어려웠던 탓이다.


이때도 녹십자는 눈부신 활약을 폈다. 녹십자는 허영섭 회장의 결단으로 2005년부터 화순공장을 준공하면서 신종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백신 개발과 생산을 준비해왔다.

마침 신종인플루엔자가 창궐한 그해 9월 녹십자는 세계 8번째로 신종인플루엔자 백신 개발에 성공하고 시판 허가를 획득한다. 녹십자는 신종인플루엔자 백신 생산 전량을 국내에 공급해 신종인플루엔자 확산 방지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전량 수입에 의존한 독감백신의 자급자족 시대를 열고, 외화절감 효과도 가져왔다.

이 같은 성과는 모두 허영섭 회장의 필수의약품 국산화 철학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가 생전 "만들기 힘든,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의약품 개발에 매진하자"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녹십자가 개발한 백신이 신종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현장을 지켜본 허영섭 회장은 그해 11월 작고했다.

◇포스트 허영섭 시대=허영섭 회장이 작고한 후 막내동생 허일섭 부회장이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허 회장은 형 허영섭 전 회장이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글로벌 사업 확장을 시작했다. 허 회장은 허 전 회장의 아들이자 자신에겐 조카인 허은철(45·녹십자 대표)·허용준(43·녹십자홀딩스 대표) 형제와 함께 성공적 글로벌 진출을 위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녹십자의 백신 부문은 수출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녹십자는 아시아 최초이자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WHO로부터 독감백신의 사전 적격성 평가 인증을 획득했다. 뒤이어 범미보건기구(PAHO) 입찰 자격도 따내면서 매년 수출 기록을 경신 중이다.

녹십자는 2014년 이후 PAHO 독감백신 입찰에서 세계적인 다국적제약사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독감백신의 누적 수주 금액은 해외 수출 6년간 2억달러(약 2200억원)를 돌파했다.

녹십자의 글로벌 진출은 이제 수출을 넘어 현지생산 구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중국 공장에선 연간 30만ℓ의 혈장처리가 가능하고, 올 상반기 내 완공을 앞둔 100만ℓ 규모의 캐나다 공장이 가동되면 국내 공장까지 총 270만ℓ 규모 세계 5위권 혈장처리능력을 갖춘 제약사가 된다.
허영섭 녹십자 회장 2007년 생전 모습/사진제공=녹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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