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못 타고났던 뛰어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5만 원 권의 주인공, 율곡 이이의 어머니,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현모양처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예술가로서의 치열했던 삶을 담담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여자아이에게는 변변한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녀는 어린 나이에 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의 ‘사임당’이란 당호를 스스로 지었고 군자의 길에 남녀가 유별하지 않음을 천명하며 아버지에게 그 호칭을 허락받았다. 시화에 두루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특히 안견의 화풍을 배워 나중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로 세간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오랜 사화(士禍)로 뛰어난 인물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평범한 배필을 골라 짝 지어준 아버지의 나름 세심했던 배려가 오히려 그녀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입신양명의 굳은 의지도, 글공부에 대한 흥미도 부족했고 그저 착하고 무르기만 했던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7남매를 낳고 키우면서, 무능력한 지아비 대신 자신의 그림 값으로 가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녀. 어릴 적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다른 여인의 치마에 그려주었다는 포도송이 그림에 관한 일화도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
“내 세계는 지아비를 받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건사하는 가족이라는 인륜의 질서가 살아 숨 쉬는 정원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느냐?”
“어머니의 세계는 어머니 자신만의 것입니다. 풀과 꽃과 바다와 산이 고동치는, 수많은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우주가 어머니의 세계가 아닙니까.”
어린 현룡(율곡)과 사임당이 주고받는 이 대화에서 작가가 던진 질문과 답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조선이 강요했던 여인들의 삶과 세계관. 그것을 장차 조선 유학계의 양대 거두가 될 어린 아들이 깨부수기를 희망하고 있지 않은가.
오죽헌에 가서 보았던 그녀의 그림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다시 찬찬히 감상해 본다.
작가의 말처럼, 사임당이 여성으로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준 높은 예술의 세계로 승화시킨 내적 인고의 순간들이 거기에 오롯이 들어있음을 기억해야겠다.
◇ 사임당, 그리움을 그리다= 주원규 지음. 도서출판 인문서원 펴냄. 275쪽/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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