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익히는 시인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7.02.18 05:00

<88> 권주열 시인 ‘붉은 열매의 너무 쪽’


2004년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한 권주열 시인(1963~)은 ‘바다의 시인’이라 할 만큼 바다의 모든 것에 천착한다. ‘붉은 열매의 너무 쪽’ 이전에 낸 두 권의 시집은 대다수가 바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울산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이기도 한 그는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보다 바다와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바라보고 듣는 바다가 정겹기만 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음조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바다는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커튼을 내리고 싶을 만큼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를 타고
말이 필요 없는 지방에 도착한 적이 있다

성긴 그물망 안에
수북하게 걸려든 입
입이 단체로 보관되고 있다

전혀 소용없는 입들 앞에
떠 있는 질문은 침수되고
방향을 어디로 틀든
물고기의 입은 최전방이다

말은
언제나 앞쪽에서 유래된다
입이 입안에서 녹고 있다

입을 뻐끔거리며 가끔씩 거울 속으로 유영하고 싶을 때
입에서 질문이 반사될 때
입은 질문 같은 낚싯바늘을 문다

산 입이 죽은 입을 흥정하고 있다
- ‘이것은 바다가 아니다’ 전문

약국을 방문한 손님들과 해종일 말을 하다 보면 “말이 필요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건 당연지사. 하지만 시인은 차를 타고 더 깊은 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또 다른 해변이나 섬의 선착장으로 간다. 시인에게 바다는 고향과 같은 곳일 수밖에 없다. 항구에는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온 물고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바다가, 파도가 말을 걸어오듯 물고기 또한 말을 걸어오는 대상이므로 시인의 눈에는 물고기의 입만 보인다. 하지만 물고기는 더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그건 바다에 있을 때, 즉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물고기의 입은 바다 밖으로 나왔지만, 물고기를 낚을 질문(낚싯바늘)은 침수된다. 바닷속이든 뭍이든 물고기의 입은 말을 거는 ‘최전방’, 즉 맨 앞에 존재한다. 그리고 입이 앞에 있듯 말도 “앞쪽에서 유래”된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의 손과 물고기의 입은 물속에서 물고 물리는 대립의 관계가 된다. 돌아보면,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물고기는 거울에 비친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고기를 낚는 인간이 물고기와 무에 다르겠는가. “입이 입안에서 녹고 있다”, 즉 말은 말로 흥하거나 망하고, 방심하는 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시인은 시 ‘물고기 병’에서도 작은 어항을 “말이 사라진 세계”라면서 “무수한 입들만 떠다닌다”고 했다. 또한, 입속의 생선 가시를 빼기 위해 진찰을 받으면서 “말이 낚싯바늘에 걸렸다"고 해 물고기의 입과 ‘나’의 입을 동일시하고 있다.


말 대신 수화를 하는 사람을 본다
말이 몸 바깥에 있구나 하는 순간

컵을 쥔 손을 떨어뜨렸다

쟁그랑하는 소리가 눈 속에서 난다

손이 몸 안으로 떨어진다
얼떨결에 손을 잡으려던 말을 놓친다

무슨 말이 더 남았을까
여전히 허공에 쟁반을 받쳐 두고

구름 밖으로 기다랗게 빠져나가는 비처럼
말 밖으로 손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손가락 마디가 사라지는 쪽으로
침묵이 컵을 들어 올린다
- ‘손의 외출’ 전문

주목할 만한 시 ‘손의 외출’ 또한 ‘말’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말 대신 수화를 하는 사람”을 보다가 “말이 몸 바깥에 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컵을 쥔 손을 떨어뜨릴" 만큼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몸과 말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몸은 몸인 동시에 말이다. 몸과 말이 뒤바뀌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한다. 눈 속에서 소리가 나고, 손은 몸 안으로 떨어진다. 한바탕 소리가 지나간 자리엔 침묵과 고요가 남아 있다. 몸 밖의 말이 침묵임을 깨닫는 순간 입의 말은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린다.

표제시 ‘연장(延長)’은 말이 사라진 세상을 다루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집, “창문도 현관문도 잠겼는데” 먼지가 쌓여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당연하지가 않다. 원래부터 집안에 먼지가 존재했지만 도둑처럼 외부로부터 침입했다고 상상한다. 식탁에 내려앉은 먼지는 “가만가만 식사 중”이다. 식탁 위 컵과 쟁반 그리고 수저도 먼지를 먹고 있다. 인기척은 없는데 불이 켜진 집, 식사하던 주인은 혼자 죽은 것 같다. “가만은 그대로 살”, 즉 죽은 이의 몸에 점점 먼지가 쌓이고 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안타까운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시인은 요즘 “말하지 않고 말을”(‘파도의 예각’) 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 붉은 열매의 너무 쪽=권주열 지음. 파란 펴냄. 138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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