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정몽구와 영어사전

머니투데이 최석환 기자 | 2017.02.15 05:00

편집자주 |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오래 전 일이다. 아는 지인 중 한분이 들려준 얘기였는데 한참을 잊고 지냈다. 당시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수소문도 해봤지만 좀처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워낙 사적인 일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버렸다.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다시 떠올려보니 곁가지는 다 자취를 감추고 핵심 뼈대만 잔상으로 남았다. 그게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영어사전'이다. 이를 차근차근 반추해보면 이렇다.

과거 자동차 분야를 담당하게 된 뒤 얼마되지 않아 그 지인과 밥을 먹는 자리였다. 현대차그룹의 핵심 관계자였던 만큼 자연스레 정 회장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물론 세간에 알려진 사실보단 숨겨진 뒷얘기가 궁금했다. 그러다 꺼내놓은 게 정 회장의 영어사전 얘기였다. 한번은 정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책상 한켠에 놓인 영어사전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 나중에 알고보니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 맞춰 정 회장이 영어공부를 위해 직접 챙겨놓은 사전이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국내 1위의 자동차기업 수장이 자신의 꿈을 위해 부지런히 매만졌을 순간들을 생각하니 그 다음부턴 정 회장이 다르게 보였다고 그는 소회했다.

'영어사전'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 정 회장의 열정은 실제 성과로도 나타났다. 2000년 그룹 출범 당시 재계 5위였지만 현재는 재계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그룹을 대표하는 현대·기아차의 전체 판매대수도 2000년 244만대에서 지난해 788만대로 3배 이상 늘어났다. 2000년 10위에 불과했던 업체별 판매순위도 2010년 글로벌 5위로 올라선 후 그 위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특히 10개국 35개 생산공장과 6개국 13개 거점의 연구개발센터, 26개국 40개의 판매법인 등 전 세계 200여개국에 구축 중인 생산·판매 네트워크에 힘입어 누적판매 대수가 1억대를 넘어섰다. 브랜드 가치도 글로벌 상위권으로 도약한지 오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장이 정체되면서 그룹 안팎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해까지 2년 연속 판매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지난해엔 창사 이래 최초로 목표치를 전년 대비 7만대 하향 조정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수시장 점유율 하락세도 심상치 않다. 한때 80%대 달했던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지며 50%대로 내려앉기도 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보호무역주의를 기치로 내걸면서 수출 전선에도 비상이 걸렸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미국 시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을 끌어내기 위해 기업의 명운을 걸고 단행한 '10년 10만 마일 무상보증제'와 같은 정 회장의 승부수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일본 교토에서 330년이 넘게 최고의 떡가게로 자리매김해온 '니시오 야츠하시' 지점엔 400년전 선조가 후손들에게 당부한 말이 적힌 이런 헌액이 걸려있다. "친절을 팔고 만족을 사라/허리는 낮추고 목표는 높게/마음가짐은 길게/도량은 넓게/생각은 깊게/일은 빠르게/원칙엔 지고 승부엔 이겨라/70%에 만족하고 10% 버려라/자손을 위해 덕을 쌓아라."

현재의 위기를 넘어 지속가능한 장수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어딘가로 사라진 정 회장의 '영어사전'을 다시 찾아 책상 위에 꺼내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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