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시력(詩歷) 50년, 노시인의 생명사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7.02.04 18:33

<86>이건청 시인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언제, 어디서 불길이 치솟을지 몰라 항상 긴장하며 산림을 감시하는 산불 감시원처럼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하여 마음에 ‘매너리즘 감시탑’을 세워 시적 긴장을 도모하는 시인이 있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건청 시인(1942~ )은 대학 강단에서 은퇴 후, 넉넉한 고향의 품에 안겨 젊은 시인들 못지않게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다. 시력(詩歷) 50년, 시인은 열한 번째 시집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에서 생명사랑이라는 높은 정신세계를 원숙한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인의 주요 관심사는 불우한 사람들이나 선후배 시인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식물들이다.

비탈길에서 여자 애가 울고 있었다.
엄마, 엄마, 다급하게, 다급하게
엄마가 탄 전동 스쿠터에 매달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를 부르는 아이를
활동보조인 여자가 밀쳐 내고 있었다.

길 위에 넘어진 아이가 다시 달려가
엄마의 다리를 잡는데
가늘고 힘없이 늘어진
엄마의 다리에 매달려 우는데,
우는 아이를 바라보며
중증장애인 엄마가 우는데……
- ‘전동 스쿠터가 있는 비탈길’ 전문

시 ‘전동 스쿠터가 있는 비탈길’은 장면이 눈에 선할 정도로 묘사가 섬세하다. 비탈길에서 엄마와 헤어지기 싫은 아이가 엄마가 탄 전동 스쿠터에 매달려 운다. 엄마와 어딘가로 가야 하는 활동보조인 여자가 아이를 전동 스쿠터 옆으로 밀쳐낸다. 길 위에 넘어진 아이는 다시 일어나 가늘고 힘없는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 중증장애인 엄마는 아이를 잡고 운다. 비탈길은 이들의 운명이 순탄하지 않음을 암시하지만, 엄마에 대한 아이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엄마의 지극한 마음이 짠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또 불우한 사람들과 시인들의 삶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구조, 폭력적인 세계를 고발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 발사된 포탄에 죽어간 가자지구 아이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은 시인 이작 카체넬존과 거기서 살아났지만 후에 센 강에 몸을 던진 시인 파울 첼란,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만들었다는 나치의 만행, 지리산 벽소령에서 죽어간 산사람들을 다룬 시편들은 시인의 높고 고결한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다.

묵호항 어시장엘 갔는데
바닷물 채워진
플라스틱 통,
유리 수조 속에,

막 잡혀온
가자미며
숭어, 고등어들이
들끓고 있었다.
어떤 놈은 통 밖까지 튀어나와
어시장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기도 하였다.
꿈틀, 꿈틀
수평선 쪽으로
몸을 옮겨보고 있었다.

필사적인 것들이
필사적인 것들끼리
밀치며, 부딪치고 있었다.
- ‘억울한 것들의 새벽’ 전문

또한 시인은 고속도로 아스팔트 길로 올라오고 있는 물오리 떼,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 감별사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온 지 24시간쯤 분쇄기에서 죽는 수컷 병아리들,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정보센터의 초저온 표본실에서 잠자고 있는 씨앗들과 같은 동식물을 대상으로 한 시편들에선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 ‘억울한 것들의 새벽’도 마찬가지다. 묵호항 어시장의 플라스틱 통과 유리 수조에 갇힌 가자미, 숭어, 고등어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애잔하기까지 하다. 밀치고 부딪치며 새벽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억울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시인은 넓은 품으로 감싸 안고 있다.

어느덧 인생의 강 하류까지 흘러온 시인은 이제 생명을 돌보며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물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귀향한 노시인 곁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다. “자신의 오장육부를/ 깊이 썩혀/ 비옥한 거름을 만들어내는”(이하 ‘아내라는 여자’), “그 거름으로 남자의 발등을 덮어/ 매일 아침 남편의 자리에/ 다시 세워주는”, “자기 몸속에 남편을 심어/ 또 다른 물과 하늘과 땅으로 된/ 따뜻한 우주 하나를/ 출산해 내는” ‘아내라는 여자’가 있다. 노시인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올곧은 정신으로 봄비 같은, 진달래꽃 같은 시를 쓰도록 곁에서 격려하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인 아내. 그래서인지 노시인의 시에는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중이 짙게 묻어난다. 잔잔히 심금을 울린다.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이건청 지음 / 서정시학 펴냄 / 145쪽 /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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