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화문글판과 벤치…父子에 빚지다

머니투데이 배성민 부장 | 2017.02.01 05:57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광화문 글판에 겨울을 맞아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이번 광화문글판 겨울편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그리고 미소를(Et un sourire)'의 일부를 차용했다. 2016.12.5/뉴스1 <저작권자 &copy;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천만이 지켜본 시구가 있다. 문구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26년째 그 자리에 있었다. 보통 겨울에는 사람이 덜 다니지만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는 특별했다. 천만 촛불시민이 촛불로 비추고 지나친 종로 1길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의 광화문글판 얘기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그리고 미소를'에서 뽑아온 구절이다. 바빠서 돌아보지 못한 주변을 살피고 희망을 나누며 살아가자는 뜻을 담았다는게 선정위원회쪽 설명이었지만 행간의 여백이 특별했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선과 뜨거움을 쥔 손이 한겨울을 덮었기 때문이다.

시대, 사회 상황과 긴밀히 소통한 광화문 글판에는 경제계와 문화계 거인의 손길이 곳곳에 배어있다. 글판은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가 제안해 1991년부터 내걸렸다. 교보빌딩 지하 1층을 적자를 무릅쓰고 통째로 서점으로 꾸민 그는 정문 한켠을 글로 채웠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믿었던 그는 수지타산과 상관없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와 책을 읽고 고르는 교보문고를 자랑스러워 했다. 교보빌딩은 교보문고와 광화문글판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만드는 집'이 될 수 있었다.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 ‘봄에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경영자이면서 스스로 한학자이기도 했던 대산다운 깐깐함이 배어든 초창기 문구였다. 글판에 시심이 본격적으로 녹아들기 시작한 것은 신용호 회장의 아들인 신창재 현 교보생명 회장 때부터다. 소독용 알코올과 마취제가 더 익숙했을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그는 교보생명 경영에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는 자리가 있다.


서울국제문학포럼, 동아시아문학포럼 등 한국문학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데 기여해 온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이 바로 그것이다. 선친이 재단을 출범시키고 난 이듬해 1993년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해왔고 25년 가까이 지난 현재도 한결같다.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자를 낼 때 첫 수상자로 고은 시인, 소설가 이승우, 평론가 백낙청 교수가 선정되면서 근거가 모호한 이념편향 문제가 요로를 통해 거론되자 ‘정치적 배경에 신경쓸 것 없이 원칙을 지키자’고 한 것도 신창재 회장이다.

그는 작년부터 지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네곤 한다.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렸다고 평가받는 소설가 한강의 소설을 선물하는 것이다. 한강의 수상작 '채식주의자'가 영국에 소개된 데에는 신 회장과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영국의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옮긴 '채식주의자'를 영국 출판사인 포르토벨로가 펴낼 수 있도록 출판을 도운 것이다. 이밖에 신달자·황동규·김애란·김연수·황석영·황정은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도 다양한 외국어로 옮겨졌다.

한국시인협회는 1월18일 신 회장을 대산문화재단과 광화문글판 등을 통해 한국 문학의 세계화와 시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명예시인으로 추대했다. 사내외 공식석상에서 신 회장은 곧잘 시를 들려주곤 한다. "친구야 너는 아니?/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라는 구절이 담긴 이해인 수녀의 '친구야 너는 아니?'라는 시를 비롯해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라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도 있다.

삼청공원 약수터 한구석에 방치돼 있던 한국 소설의 개척자 염상섭 작가의 동상을 서울 한복판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종로 출입구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도운 것도 그다. 아직 날씨가 차갑지만 교보문고에서 나올 때 염상섭동상의 벤치에 앉아보는 것은 어떨지. 촛불시민이든, 태극기시민이든, 모두에게 열려있고 물론 당신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머니투데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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