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 봬도 1969년에 면허 따고 운전만 반세기 가량 한 베테랑”이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으스댔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닭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1945년생 해방둥이다. 인터뷰 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만남을 기약하자 했더니, “나 KBS ‘인간극장’에도 안 나간 사람”이라며 “만남은 이걸로 끝”이라고 ‘쿨’하게 쏘아댔다.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낸 뒤 설득과 회유를 통해 서울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올해 72세, 작은 체구지만 날렵함과 과감함으로 남성 운전사를 ‘위협’하는 노처녀 닭띠 드라이버 김금옥씨는 젊은 시절 총기를 잊지 않고 살아온, 아니 살아낸 인생을 야무지게 발산했다.
"엄마 데리고 살게"…노처녀와 사회생활로 '증명'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만 나왔는데, 고등학교 나왔다고 거짓말로 이력서 내고 무역회사에 처음 취직했거든. 한문을 좀 쓰니까, 먹힌 거지. 미얀마에 송이버섯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근무하다 보니 성질이 나잖아요. 나는 6000원 주고, 미스터 김은 8000원을 주는 거야. 너무 불공평해서 그럼 나도 남자 일을 해야겠다고 해서 찾은 게 운전사 일이었어요.”
불공평을 이유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 운전으로 방향을 튼 것도 충격이지만,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면 여성이 회사 다닌 것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었다. 이 얘기를 꺼내기 위해 그는 6.25가 터진 1950년으로 되돌아갔다.
“6.25 직전, 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월남했어요. 하지만 그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막내 남동생은 장티푸스로 세상을 등졌지요. 나와 언니 세 명이 어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벌이가 없으니 맨날 손가락만 빨고 지냈어요. 그러다 1.4 후퇴 때 중공군이 내려와서 함께 살았어요. 중공군에겐 당시 (잠잘 때) 베고 자는 빵이 있었어요. 야전 식량이었죠. 6살인 제가 하도 배가 고파 침을 흘리면 중공군이 딱딱한 빵을 깨뜨려서 한입 물려주곤 했어요. 중공군이 이 빵을 졸리면 베고 자고, 배고프면 깨뜨려 먹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들이 귀중했던 당시, 어머니는 남자 없는 가족살이에 쉴새 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비 오는 날, 농사짓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일라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아들 없는 타령에 눈물을 내비치곤 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걱정마, 내가 아들 노릇하면 되잖아. 엄마 데리고 내가 살아줄게”하고 다짐했다.
살 길이 더 막막해지면서 심부름하고 밥 얻어먹으라고 언니 셋은 친척들에게 보내졌다. 막연하게 던진 막내딸의 약속은 심지 굳은 맹세가 되어 돌아왔다. ‘아들이 되겠다’는 약속은 회사에 다니게 했고, ‘엄마와 살겠다’는 약속은 노처녀로 남게 했다.
“어머니가 81세까지 재미있게 살다 가셨어요. 그전엔 40세가 될 때까지 시집가야 한다고 그러시더니, 나중엔 ‘니가 없으면 어떡할 뻔했니’하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남자보다 더 드센 '억척녀'…"택시 외엔 어느 곳도 눈길 안줘"
26세 처음 택시 운전대를 잡고 나서 그의 활약은 도드라졌다. 사납금 2500원을 내고 3000원을 더 가져갔을 정도였다. 비결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절대 차에서 내리지 않는 것이다.
“당시에 형부가 돌아가셔서 언니와 애들 3명의 부양까지 제가 했어야 했죠. 밥 먹는 돈도 아까워서 새벽에 나올 때 집에서 한번 먹고는 밤 12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끼도 먹지 않았어요. 한 끼 먹으면 우리 식구 한 끼가 날아 가니까.”
“여자라서…”라는 말 듣기 싫어 일이 없을 때도 사납금을 내며 일자리를 지켰던 억척녀였다. 김씨는 “나를 써준 게 너무 감사해서 ‘땡땡이’ 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며 “30년 무사고로 운행하면서 택시 운전 외에 딴 생각 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운전 초기에는 남자 못지 않게 우악스러웠다. 술 먹고 행패 부리면 한대 패기도 하고, 진로 방해하고 도망가는 자전거 따라가서 때린 뒤 치료비 내주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개인택시를 하면서 생각도 바뀌었다.
물 흐르듯 사는 인생의 묘미…"상대방의 입장 고려하고 수용해야"
“화를 내면 꼭 사고가 나요. 우리 식구 다리 아파서 태운다는 생각 하면 투정할 것도 없죠.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하면 스트레스도 거의 안 받아요.”
택시 운전 50년 가까이하면서 그가 배운 철학은 ‘물이 흐르는 대로’이다. “소설 ‘황진이’를 보면 불보다 무서운 게 물이고, 강한 것보다 유한 게 더 세다는 걸 알려주잖아요. 그렇게 인생을 배워가는 것 같아요.”
앞으로 폐차하기까지 4년 정도 남았다는 그는 “50년이 되는 해에,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낼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접을 때 즈음, 그가 ‘택시 민심’ 안 물어보느냐며 한마디 툭 던졌다.
“운전하면서 버려야 할 운전사의 덕목이 고집이에요. 그거 버리면 모두가 행복하지. 지금 정치를 보세요. 난 무식해서 그런 거 잘 모르지만, 고집 때문에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가 나오는 거 아닌가요? 따뜻한 밥 먹고 살면 됐지 뭘 그렇게 욕심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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