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전 오늘(1926년 12월28일) 그는 이곳에서 조선수탈의 심장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폭탄을 터뜨려 건물을 폭파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홀로 총 한 자루를 들고 건물에 진입, 일본인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세 발은 자신을 위해 남겨뒀다. 그는 총상을 입은 채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던 중 숨을 거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인에겐 악명 높은 곳이었다. 조선의 땅, 자원 등을 수탈하기 위해 1909년 일본이 한국에 세운 회사다. 이 회사를 매개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토지와 금융을 장악해 조선을 갈취했다.
나석주는 이날 동양척식회사 건물을 폭파해 일본의 계속되는 착취행위를 위협하고자 했다. 삼엄한 경비로 진입이 어렵자 그는 남대문에 있는 식산은행을 노렸다.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석주는 신문지로 둘둘 말아 숨긴 폭탄을 꺼냈다. 안전장치를 풀고 재빨리 일본 사람들을 향해 던진 후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나석주는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발길을 돌렸다. 2000만 조선인의 원흉인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를 쫓는 경비들을 따돌리고 다시 동양척식회사 안으로 들어온 그는 경비가 제지하자 그에게 총을 쏜다. 2층에 올라가 동양척식회사 직원 2명에게도 권총을 발사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폭탄 하나를 던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터지지 않았다.
나석주는 재빨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를 경찰이 뒤에서 바짝 추격했다. 나석주는 뒤를 돌아 경찰에게 총을 쏴 쓰러진 것을 본 후 다시 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도주는 가로막혔다. 경찰들이 점차 포위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탄알 세 발을 자신의 가슴을 향해 쐈다. 그는 총독부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일본경찰을 노려보다 숨을 거뒀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한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의 몫 이상을 해냈다.
그의 '희생'은 일본의 보도 금지 지침이 풀린 17일 뒤에야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알려진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들은 항일운동에 대한 자긍심과 의지를 갖게 됐고 경성에 있는 일본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특히 나석주가 이날 사용한 폭탄과 총이 각각 소련과 스페인 제품이라는 데 일본 경찰은 깜짝 놀랐다고 전해진다.
나석주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한 후 자결한 김상옥 열사와 함께 무력항일운동을 주도한 의열단에서 가장 용맹한 단원으로 꼽힌다.
그에게 폭탄과 권총을 지원해준 같은 결사대원 김창숙은 "단신에 총 한 자루를 갖고 많은 적을 쏘아 죽인 다음 자신은 태연히 죽음으로 돌아가는 듯이 생각하고 있으니 3·1운동 이래 결사대로 순국한 이가 퍽 많았지만 나군처럼 한 사람은 없었다"며 일기에 소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죽어서도 일본의 수모를 겪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찾아온 그의 아들을 8일 동안이나 구금했고 나석주는 그 사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다. 그의 유골은 이후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 묻혔다.
그로부터 73년 뒤인 1999년 11월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한국정부는 나석주 의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의거 현장인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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