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늦은 시의 불꽃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6.12.24 07:10

<80> 이해원 시인 ‘일곱 명의 엄마’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해원 시인(1948~ )의 당선소감이다. 당시 64세였던 시인은 신춘문예가 시작된 이래 ‘최고령 신인’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지천명에 접어든 1998년, 그러니까 14년 만에 시인이 된 셈이다. 그것도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때에.

아빠가 엄마 손을 잘랐다 흙에 묻어 놓고 맨날맨날 들여다봤다 엄마는 한 손으로 빨래하고 밥도 했다 엄마의 남은 손 하나를 또 잘라서 흙에 묻었다 손이 없는 엄마는 다른 데서 손이 나왔다 흙에 묻어 놓은 엄마의 손은 점점 자라서 몸통이 되고 거기서 손이 나와 엄마가 되었다 또 손을 잘라서 묻으면 엄마가 되고 되고 되고 그래서 엄마는 수없이 많아지고 아빠는 선인장 화분을 아주 많이 갖게 되고

엄마가 병원 가고 없으면 나는 집이 무서웠다 동생한테 엄마가 네 명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유치원에 이마트에 그리고 피자집에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생은 엄마가 세 명 있으면 좋다고 했다 우리 집에 어린이집에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엄마가 있으면 좋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내 엄마 동생 엄마가 따로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잠만 자는 엄마를 산에 묻었다 산은 아주아주 큰 화분이라고 아빠가 그랬다 아저씨들이 엄마를 흙으로 덮으면서 마구 떠들었다 저러다가 엄마가 깨면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엄마를 꺼내가지 못하게 아저씨들이 꼭꼭 흙을 밟을 때 나는 기도했다 엄마 싹이 일곱 개 나오게 해 달라고, 아주 큰 엄마 화분을 다 만들고 아빠가 물을 뿌릴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 ‘일곱 명의 엄마’ 전문

몸이 아팠기 때문인지, 이번 시집에는 병(病)과 더불어 치열한 생존을 다룬 시들이 많다. 유치원생의 눈높이로 쓴 ‘일곱 명의 엄마’에도 아픈(죽은) 엄마가 등장한다. 중병에 걸린 엄마는 화분에서 자라는 선인장처럼 누군가(아빠)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 어린 화자는 “집에 유치원에 이마트에 그리고 피자집에”, 동생은 “우리 집에 어린이집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엄마가 “따로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한창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엄마의 부재는 상실감을 넘어선 절망 그 자체다. 하지만 아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아내를 보내고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만 하는 아빠는 “산은 아주아주 큰 화분”이라며 아이들을 달랜다. 다육식물인 선인장을 잘라 심으면 안 죽고 자라듯 아이들은 “엄마 싹이 일곱 개” 나오길 기도한다. 아빠가 엄마 무덤에 뿌려주는 물은 아이들과 엄마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매개물인 동시에 희망의 상징이다. 슬픈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마음 아픈 시다.

열쇠를 꽂아도 반응이 없다
가로막힌 벽 하나로 이곳과 저곳
완벽한 단절이다
거실 전화벨 소리만 현관문을 넘어 온다

말귀가 막힌 철문
투덜거린 말들, 다급한 마음이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통이란 마음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는 것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내 열리지 않던 사람처럼

나를 거부하는 저 벽창호
문을 바꾸려는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문득 어느 전철역 광고가 생각났다

곤룡포의 갑옷 사진
어느 쪽이 甲옷일까요
아이들이 모르는 것

그동안 마음을 헤아린 적 없이
차가운 열쇠로 명령만 내렸다

내가 甲이었다
- ‘갑옷’ 전문

2012년에 발표한 시 ‘갑옷’의 원제는 ‘관계’였다. 제목뿐 아니라 시구와 내용도 확 바뀌었다. 퇴고를 거듭해 시를 다듬는,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성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에서 ‘나’와 ‘문’은 소통의 관계에서 단절의 관계로 전환됐다. 아무 문제 없이 소통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관계가 단절된 것. 이는 소통의 중재 역할을 하던 열쇠 탓이다. “가로막힌 벽 하나로 이곳과 저곳”으로 완벽히 단절된 상태에서 “소통이란 마음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는 것”이라는, 나와 문과의 관계에서 내가 늘 갑(甲)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을 헤아린 적 없이” 우월한 지위에서 “차가운 열쇠로 명령만 내렸다”는 자각은 그의 시가 일상의 감정이나 이성에 머물지 않고 정신적 가치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단절과 관계회복에 끊임없이 천착한다. 표제시 ‘냉장고는 태교 중’도 마찬가지다. “냉으로 가득 찼던 불임의 냉장고가 임신을 했다”는 매력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냉장고를 통해 관계의 단절을, “여섯 살 계집아이가 넣어 둔 인형을” 통해 관계의 회복을 도모한다. 갑(甲)인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쳐진 냉장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내쳐짐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이는 임신을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마음을 비우자 들어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화책과 잡지를 보고, 음악을 듣고, 저울의 눈금을 세어보는 태교에 이르면 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또한 시인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물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다가 단속원에 걸린 불법 이주노동자, 졸다가 종점까지 갔다 온 소시민 가장, 유원지 공중화장실 미화원, 전신주 꼭대기의 까치집 등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슬픔이나 불행, 고통을 오랜 시간 숙성시켜 시로 풀어내고 있다. 몸은 늙었으나 열정과 정신 그리고 시는 결코 늙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첫 시집 ‘일곱 명의 엄마’에서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 일곱 명의 엄마=이해원 지음. 시산맥 펴냄. 132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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