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헤밍웨이의 꼼꼼한 다이어트 기록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6.12.24 06:22

<49> 쿠바에서 만난 헤밍웨이 집 화장실의 숫자들

편집자주 |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헤밍웨이가 쿠바 아바나에 거주할 때 살았던 집 Finca la Vig&#237;a./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 외곽 12km지점에 있는 언덕 위의 하얀 집. 지금은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불리는 ‘헤밍웨이의 집(Finca la Vigía)’이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살았다.

헤밍웨이가 쓰던 식탁과 침실과 서재를 돌아 마지막으로 욕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말을 건 사람은 50대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생긴 것만으로는 현지인인지 외국 관광객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서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게 자꾸 벽을 보라고 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주기라도 하는 듯,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벽을 가리켰다.

“저기 저 벽에 글씨 보여요?”

“벽? 아!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자세히 안 보이네요. 저게 뭐예요?”

“헤밍웨이가 써놓은 글씨예요. 아침마다 저울에 올라가서 몸무게를 잰 다음 저렇게 써놨다고 해요.”

“아하! 위대한 작가도 체중과 전쟁을 한 모양이네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으니, 유일한 방법은 카메라 망원렌즈로 당겨보는 것이었다. 한참 당겨서야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몇 년 간에 걸친 한 남자의 기록, 20세기 문단의 거장이라고 불린 한 사내의 발가벗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다.

헤밍웨이가 화장실 벽에 써놓은 숫자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숫자를 하나씩 분석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연도가 불분명해서 정확한 통계는 어려웠지만, 그는 어느 정도 감량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아주 느린 속도로…. 몇 년도인지 불분명한 첫해에는 ‘240’이라는 숫자를 넘나들었다. 그가 복싱을 즐기던 거구였다는 것을 감안해도 체중이 240kg까지 나갔을 리는 없다. 단위가 파운드라고 믿고 kg으로 환산하면 108kg쯤 된다.


숫자는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 결국 헤밍웨이의 의지가 승리한다. 242까지 올라갔다가 조금씩 줄기 시작해서 1958년에는 209~210을 넘나들고, 1960년에는 드디어 200까지 내려간다. 그가 쿠바를 떠난 해가 1960년이니까 결국 90kg 이하까지 감량은 하지 못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체중기록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헤밍웨이가 적어놓은 숫자에 그의 ‘깨알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30이라는 숫자 옆에 1/4이나 1/2등의 숫자가 빼곡히 적혀있는데, 바로 1단위 감량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데 조바심이 난 그가 소수점 이하에 매달렸다는 증거다.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대범한 모습으로 보이길 원했던 헤밍웨이였지만, 소심하고 깨알 같은 성격이었다는 증언도 있는 것을 보면, 그 숫자들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아바나까지 가서 기껏 헤밍웨이의 몸무게나 분석했느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 시선은 늘 남들이 닿지 않은 곳에서 오래 머물고는 한다. 사실,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제법 볼만한 것들이 많다. 우선 입지나 풍경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 개를 사랑한 헤밍웨이가 50마리의 개를 키웠다는 집은 넓기도 무척 넓다. 9000권의 장서가 있었다는 서재는 금방 책을 읽다 산책이라도 나간 듯 생생했고, 식탁에는 조금 전 식사를 마친 것처럼 그릇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침나절의 햇살이 비껴들고 있는 침대 위에는 보다만 신문이 지나간 하루의 소식을 전하고….

하지만 내겐 그저 ‘한 사람이 살던 곳’일 뿐이었다.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역시 화장실 타일 벽의 숫자였다. 그의 사소한 내면,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소설가의 위대하지 않은 일상이 내게는 더욱 살갑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쿠바는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가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듯이 헤밍웨이를 빼고 쿠바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만큼 그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하지만 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기록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숫자를 하나씩 써넣는 그의 표정을 상상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나는 위대한 소설가보다는 평범한 한 남자의 ‘좁은 속내’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좇아 누군가 가리키는 방향만 바라보는 순간, 여행자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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