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79> 서정춘 시인 ‘이슬에 사무치다’

관찰의 깊이가 끝에 닿아 물아일체의 경지를 넘어선 지경의 세계다. 화자는 이슬방울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그 이슬방울을 자세히 보는 몰입에 빠지다 보니 대상을 보고 있는 수단인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그것이 지나쳐 돋보기 만한 이슬방울까지 되고 싶다고 한다. 물아일체의 지경이다. 목표와 수단과 주체까지 일체가 되는, 한 덩어리가 되는 경지이다. 오죽하면 관찰자가 화자가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고 하는가. 화자는 이슬방울 속으로 들어가서 아예 살점이 되고, 이슬방울에 살점을 보태고 싶다고 한다. 끝내는 이슬방울이 모인 샘물을 들어 올리고 내리는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고 한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사물, 즉 이슬이라는 시각적 대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 즉 새 울음인 청각적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형상하기도 한다. 비둘기의 울음을 구음(口音)과 노숙자의 곡비로 비유하는 것이다. 어느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 포획되기만 하면시적 형상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경우다.

저, 口音이 애터지다

구구절절

구구절절

구걸이 안 된 곡절이 저렇다
- ‘비둘기 1’ 전문


앓다

서럽다

비 오는 날의 곡비겠다

노숙자의,
- ‘비둘기 2’ 전문

사물에 대한 심오한 관찰과 축약을 통해 서정적 폭발성이 강한 시를 쓰는 서정춘 시인은 최근 ‘이슬에 사무치다’를 냈다. 독립출판사에서 만든 보기 드믈게 장정이 아름다운 핸드메이드 시집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제주에 내려가서 사는 가내수공인 출판전문가 이순호가 만들었다.

서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출판사에서 28년을 근무했고, 1966에야 등단 28년 만에 첫 시집 ‘죽편’을 냈다. 이후 3개의 시집을 더 냈고, 박용래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의 첫 시 ‘은희’는 시인의 누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보아온 보편적 누이의 역사이기도 하다. 시인은 “나에게는 여러 십 년 전 전날의/ 저 빨치산 아낙 같은 누님이 있어/ 전설처럼 멀고 먼 산골 마을로/ 달비 끊어오겠다며 길 떠난 지 오래/ 여태도 소식 없어 낮달처럼 희미해진/ 누님의 이름은 은희였다/ (울다가 웃음 반 울음 그친 얼굴의…)”(‘은희’ 전문)

칠십 중반이 넘은 시인의 누님이 되니 오래된 이야기이고, 빨치산이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가히 전설처럼 먼 얘기가 된다. 그 역사마저 빛이 바래어 낮달처럼 희미해졌으니 다분히 신화적이기까지 하다. 오래전 이야기인가 하면 지금도 잘 들리는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짧고 세밀하면서도 서정적인, 광대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시 19편이 모인 단정한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를 읽는 “거룩한 밤”을 경험하길 바란다.*

◇이슬에 사무치다=서정춘 지음 글상걸상 펴냄. 33쪽/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