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전 오늘…中 난징에서 지옥문이 열리다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 2016.12.13 06:00

[역사 속 오늘] 일본군, 중국인 30만명 학살 기록…일본정부는 '부인'

난징 대학살 때 촬영된 사진들./사진=위키피디아

"일본군이 들이닥쳤을 때 가족 9명과 살고 있었는데 나와 여동생을 제외한 7명 모두가 일본군에 살해됐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몹쓸짓을 하고 살해했습니다."(중국의 85세 할머니가 증언한 난징대학살)

만주를 시작으로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13일 난징을 점령했다. 군 지도부가 달아나고 시민들과 무장해제한 병사들만 남아있던 난징에선 말 그대로 생지옥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사로잡은 중국군 포로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당시 인구 조사 결과, 난징대학살 이후 총 인구의 30만명이 줄었다.

학살 방법은 잔인했다.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성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목 베기 시합의 희생물이 됐다. 일본군은 전쟁 중 총알을 아끼기 위해 이들을 산 채로 파묻어 생매장하거나 칼로 난도질해 죽이기도 했다.

광장에선 100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줄을 세운 후 석유를 붓고 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몸에 박히면서 불꽃이 피었고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여성들은 강간 후 잔인하게 살해됐다. 10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부터 60·70대 노인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수녀와 비구니도 피해갈 수 없었다.

훗날 발견된 어느 일본군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일본군은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해 이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 연구도 했다. 이를 주도한 곳은 'Ei 1644부대'로 매주 10여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으로 희생을 당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서구권에선 이를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 부른다.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와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는 전쟁이 끝난 후 난징 법정에서 사형됐다.

하지만 79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은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사건'이라고 칭하며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1998년 일본 사학자들은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당시 모든 역사적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난징에서 학살이 자행된 일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오히려 일본군 점령 이후 난징 시민 생활수준이 개선됐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중국 정부는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일본군이 촬영한 사진과 미국인 선교사 존 매기가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상, 중국인 여성 청루이팡의 일기(중국판 '안네 프랑크의 일기로 알려짐) 등이 사실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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